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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Culture/history

우리나라의역사

by lisa311 2014. 2. 25.

 

여러분..경술국치라고아십니까?
경술년에 일어난 국가의 치욕

 


庚. 戌. 國. 恥
경술년에 일어난 국가의 치욕.

후손들이여 기억하라. 다시는 이런 치욕을 겪지 않기를.
치욕의 역사를 잊었을 때 그 역사는 반복된다.

1910년 8월 29일에 일어난 국치로, 한국 최대의 흑역사. 말 그대로 흑역사인 게, 한국이라는 나라가 역사상에서 사라졌었다!

 

일제강점기의 시작을 알리는 시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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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명칭과 관련하여 ¶

한국에서는 한일합방, 한일합병, 경술국치라고 부르고 일본에서는 일한병합(日韓倂合)이라고 부른다.

 

원래 일본은 '병탄(倂呑)'이란 말을 쓸까도 했지만,침략적인 의도를 은폐하려고 '병합(倂合)'이라는 용어를 의도적으로

 

병탄(倂呑.다른 나라의 영토를 한데 아울러 제 것으로 만드는 것)'하면서도

 

조선인의 반발을 사서 저항을 불러 일으킬까봐

 

'병합(倂合)'이라는 용어를 의도적으로 병합'이란 신조어를 만들어 침략의미를 흐린 것.#

 

현재 국어사전에는 병합=합병≒합방이라고 되어 있다. 합병은 둘 이상의 단체, 조직, 국가를 합치는 것, 합방은 둘 이상의 국가를 합치는 것.

이걸 한국에서 '합방'이라는, 동등한 자격으로 합친다는 의미를 가진 말로 바꿔서 부르는 건 정신승리법에 버금가는 자기위안일 뿐 아니라

 

한국이 일본과 합치는 것을 원했다는 의미까지 가질 수 있지만, 별로 신경쓰는 사람은 없다(…).

 

애초에 일본은 한국을 동등한 관계로 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으니 그냥 국치로 쓰는게 맞다.

 

조약의 공식 명칭은 일본의 이러한 의지가 반영되어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韓国併合ニ関スル条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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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라가 망하기까지의 과정 ¶

경술년(1910년) 8월 22일에 이토 히로부미의 주도하에 일본과 조선간에 조인된 이 조약이 1주일이 경과된 이날 공표됨에 따라

 

순종의 조칙이 발표되어 8월 29일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후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고

 

한반도에서 물러나는 8.15광복까지 조선 총독부의 식민지배 아래 35년간[1] 한국인은 일본인의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

 

이때 조선에서 협조한 개들의 명단은 경술국적 항목을 참고.

그래도 마지막 충신은 있어서, 학부대신 이용직은 "이 같은 망국안에는 목이 달아나도 찬성할 수 없다"라고 반대하면서 뛰쳐나갔다.

 

맹꽁이 서당에서는 이용직이 나가기 전 나는 일당처럼 길거리에서 칼에 찔리고 싶지는 않다라며 어느 견공자제분을 디스하였다.

사실 총리대신이었던 이완용 자체는 초기엔 일진회의 "자발적 병합" 주장을 반대했다. 마지막 양심일까 아니면 총리를 더 하고 싶어서일까

 

그런데 금방 바꿔서는 자기 스스로 나라를 말아먹으며 을사오적, 정미칠적에 이어 자랑스런 삼관왕을 이룩했다.

 

그리고 일진회의 주장에 비해 더 가혹한 조약이 맺어졌다. 그리고 이완용을 비롯한 일진회는 일제가 주는 오등작을 받았다.

하긴 이완용이 반대했어도 이미 마지막 통감이자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계획서를 가지고 입국했으니 막을 수도 없었다.

 

이토 히로부미 생전에 이미 정해져있던 것...[2]

일본근대사(혹은 현대사)에서는 이 시점이 러일전쟁과 함께 제국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점으로 본다.

 

(청일전쟁과 대만은 결정적인 시작은 아니니까) 결국 국가 막장 테크의 일반적 이론처럼 무리한 조선의 식민지배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만주를 넘보다가 만주국을 세우고(만주사변), 중국마저 넘보다가 중일전쟁을 일으켜 결국 핵폭탄을 두방 맞고서야 끝나게 되는

 

시초가 되었다는 시각. 이 점에서 경술국치는 일본 제국주의의 신호탄이자 동시에 필연적인 멸망을 부르는 시발점이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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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한일병합조약 전문 ¶

한일병합조약 전문은 다음과 같다.

한국 황제 폐하와 일본국 황제 폐하는 두 나라 사이의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상호 행복을 증진시키며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자고 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면 한국을 일본국에 합병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확신하고

 

이에 두 나라 사이에 합병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를 위하여 한국 황제 폐하는 내각 총리 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을, 일본 황제 폐하는 통감(統監)인 자작(子爵) 사내정의(寺內正毅;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각각 그 전권 위원(全權委員)으로 임명하는 동시에 위의 전권 위원들이 공동으로 협의하여 아래에 적은 모든 조항들을 협정하게 한다.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넘겨준다.
일본국 황제 폐하는 앞조항에 기재된 넘겨준다고 지적한 것을 수락하는 동시에 완전히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락한다.
일본국 황제 폐하는 한국 황제 폐하, 태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와 그들의 황후, 황비 및 후손들로 하여금 각각 그 지위에 따라서 적당한 존칭, 위신과 명예를 받도록하는 동시에 이것을 유지하는 데 충분한 연금을 줄 것을 약속한다.

 


일본국 황제 폐하는 앞의 조항 이외에 한국의 황족(皇族) 및 후손에 대하여 각각 상당한 명예와 대우를 받게 하는 동시에  

이것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줄 것을 약속한다.

 
일본국 황제 폐하는 공로가 있는 한국인으로서 특별히 표창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 대하여 영예 작위를 주는 동시에

은금(恩金)[3]을 준다.


일본국 정부는 앞에 지적된 병합의 결과 전 한국의 통치를 담당하며 이 땅에서 시행할 법규를 준수하는 한국인의 신변과 재산에 대하여

충분히 보호해주는 동시에 그 복리의 증진을 도모한다.


일본국 정부는 성의있게 충실히 새 제도를 존중하는 한국인으로서 상당한 자격이 있는 자를 사정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한국에 있는

제국(帝國)의 관리에 등용한다.


본 조약은 한국 황제 폐하와 일본국 황제 폐하의 결재를 받을 것이니 공포하는 날로부터 이 조약을 실행한다.

이상의 증거로써 두 전권 위원은 본 조약에 이름을 쓰고 조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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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기타 ¶

주러 공사로 을사조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이 박탈된 이후에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남아 조선의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헤이그 특사 중 한 명인 이위종의 아버지인 이범진은 국권피탈의 소식을 듣고 적을 토벌할 수도 복수할 수도 없다는 깊은 절망에 빠져

자결하였다.

 

금산 군수로 '임꺽정'의 저자 벽초 홍명희의 아버지이기도 한 홍범식도 목을 매 자결하였으며 그 외에도 매천야록의 저자 매천 황현 등

많은 선비들이 자결하였다. 그러나 을사조약 때와는 달리 현직 고위 관료 중 자결한 이는 없었다.

한편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냈다고 한다. #

2010년은 이 흑역사가 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물론 짧은 기간은 아니지만, 지난날의 과오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면 항상 기억해두며 반성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청소년들의 상당수는 이미 잊었다...아니 이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이들도 있다.

중학생들 중 한일합방의 흑역사를 모르는 학생들이 한 반에 1/3이 넘는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다...

게다가 성인들 중에서도 이 사실을 잊어버린 사람이 늘어나는 모양이다.


여담이지만 2009년 9월 이명박 대통령은 2010년 경술국치 100년 기념으로 일본의 천황을 국내에 초대한다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일단 소위 '천황'을 국내에서 부르는 공식 명칭은 '일왕'이다. 국가원수로서 존중하는 의미였어도 '덴노'라고 부르면 충분했을 정도로

 

단어 선택에 신중을 기하지 않은 잘못에다가 기념이란 단어까지 쓴 것은 한마디로 말해 어이 없다.

 

물론 진짜 그걸 기념한다는 뜻은 아닐 테고 언어 선택을 확실히 잘못한 거다.

 

그래선지 결국 안왔다 저런 말까지도 했던 사람이 2012년에 이 대통령 독도 방문과 일왕 사과 발언을 해서

 

한일관계가 최악이 된걸 보면 새삼 격세지감이 든다.

 

[출처] 경술국치|작성자 할짓없는페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