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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Culture/history

러. 일전쟁은 영국. 유대인. 조선친일파. 협조로 승리했다.

by lisa311 2014. 2. 25.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이 또다시 러일전쟁을 일으켜 러시아가 개항한지 50년 밖에 안 된 신생(新生) 약소국일본에게 패전(敗戰)하게 된 3대 원인을 밝혀보자.

 

 

첫째: 1.2차 영, 일 동맹으로 영국의 협조로 일본이 러일전쟁을 승리할 수 있었다.

 

일본은 청. 일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독일, 프랑스, 러시아의〔삼국간섭동맹〕을 통해 국제사회의 지원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을 치르기 전에 그 당시 러시아와의 경쟁관계에 있었던 영국과 동맹을 맺었다.

 

 

 

1. 2차 영. 일 동맹에서 일본은 영국의 인도 지배를 영국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서로 인정해주기로 합의했다.

한편으로 미국과의 가 쓰라. 태프트 비밀협약을 통해서,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미국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서로 인정해 주면서 강대국들끼리 약소국을 나눠먹는 협약을 체결했다.

이와 같이 일본은 영국과, 미국과의 삼국동맹을 체결한 후에 러일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영국은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강대국 러시아와의 대립상태에서 대신해서 싸워줄 동맹국이 필요하던 때에

 일본이 먼저 영국에게 동맹을 맺기를 원했고 양국 간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

1902년 1월 30일 제1차 영일 동맹을 체결했다.

 

 

 

일본은 청일 전쟁배상금으로 받은 3억 엔으로 7년간에 걸쳐 집중적으로 해군력을 증강시켰다.

영국은 일본에게 최신 고속함정 등 군비지원을 하였고 이는 일본의 자신감이 극도에 달해

동양에서의 패권을 잡기위해 러일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1904년 9월· 북유럽 러시아해군기지 크론슈타트 항에 정박 중이던 발틱함대가 대마도해협을 향해 출항했다.

45대의 함정으로 구성된 발틱함대는 전 세계최강으로 러시아해군의 상징으로 오늘날 미7함대와 같은 역할을 했다.

 

 

그 당시 러시아의 군사력은 프랑스 나폴레옹군대를 전멸시켰을 정도로 막강했고,

러일전쟁당시, 세계최강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고 있었으며,

영국을 비롯한 세계열강들조차 경계대상1위로 꼽을 만큼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육-해군을 보유한 러시아군대였다.

 

 

 

이러한 러시아의 발틱 함대가 일본을 제압하기위해 참전하자.

일반민중은 물론 전 세계의 군사전문가들도 모두 러시아의 승리를 예측하며

세계열강들이 과연 일본이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을지 긴장하며 지켜보았다.

 

 

 

그러나 러일전쟁은 예상 밖의 결과로 일본의 승리로 끝났고

누구도 주목하지 않은 섬나라 일본이 새로운 강대국으로 등장하여 서구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되었다.

 

 

세계최강이라는 명성과 함께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허망하게 침몰하게 된 1차원인은

일본이 영국과 맺은 영. 일 동맹을 통해서 영국의 적극적인 협조로,

전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두고 있었던 영국이 러시아 발틱함대의 항로를 방해하고 입항을 저지했기 때문에

러시아가 패전(敗戰)하게 됐다.

 

 

 

영국이 지중해를 장악하여 수에즈운하를 원천봉쇄함으로서 발틱함대는 지름길을 두고

몇 배나 먼 거리인 아프리카 대륙의 희망봉까지 우회해야만 했다.

 

그 항해는 죽음에 항해로 너무나 멀고도 험난한 긴 여정으로, 영국의 식민지국가인 아프리카대륙 국가들과, 인도와 홍콩 등

여러 나라들이 러시아의 발틱함대 입항을 거부하여 생필품인 물과 식량보급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러시아병사들은 수 개월간 바다위에서 휴식도 없이 무리한 항해를 계속하자 위급한 환자가 속출하여,

그들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목적지인 대마도해협에 도착하기 전에 무수히 많은 장병들이 죽어가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한편, 동부전선의 만주봉천 뤼순(旅順)전투에서 일본군의 끈질긴 저항으로 전쟁은 장기전으로 전개되어

러시아정부가 경제적 어려움으로 큰 고통을 당하고 있던 시기에 러시아국민들이 살기가 어려워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러일전쟁 기간 중에 1905년 1월 22일 15만 명의 노동자와 가족들이 황제를 만나기 위해서

상태르 브르크의 겨울광장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때 무장한 군인들은 평범한 일반군중을 향해 발포를 했다.

바로 이 사건을 ‘피의 일요일’, ‘피의 니콜라이’라고 부른다. 러시아사회의 위기상황은 발틱함대에도 전해졌고

본국으로부터 물자지원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고 군수품(軍需品)도 러시아군의 사기(士氣)도 바닥난 상태였다.

 

 

 

발틱함대는 크론슈타트 항을 출발한지 8개월 만에 지구둘레의 4분의 3인 33,000km를 돌아서 대마도해협에 도착하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80여척의 일본군함들이 발틱함대를 향해 무참하게 선제공격을 가해 개전 24시간 만에 발틱함대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 한 체 일본군함에 의해 처참하게 침몰하여 6천여 명이 전사했다.

 

 

 

러일전쟁의 패배(敗北)는 러시아역사를 바꾼 도화선이 되어, 수백 년간 이어진 전제군주체제인 로마노프 왕조가 몰락하고

1917년 10월 볼셰비키혁명으로 소비에트연방의 공산국가가 탄생되었다.

 

1백 10여년 전 작은 섬나라 일본의 러일전쟁승리는 극동의 강대국으로 탄생하여 20세기 한국과 세계역사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둘째 : 미국유대인의 협조로 일본은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러일전쟁당시 일본은 만주봉천에서 35만의 러시아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으며

일본군이 러시아의 막강한 육군을 쉽게 제압하지 못 하고 예상 밖에 큰 희생 속에 막대한 사상자가 속출하였고,

전쟁규모는 날이 갈수록 커져갔다.

 

 

러일전쟁은 장기전으로 가면서 러시아와 똑같이 일본도 군수품이 바닥난 상태에서 막대한 전쟁비용지출로

심각한 경제난을 겪으면서 패전(敗戰)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다급해진 일본은 전쟁자금을 마련하기위해 일본정부국채를 발행했으나 당시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전(勝戰)할 가능성이

낮게 보여 일본국채가격은 국제금융시장에서 크게 떨어졌다.

 

 

 

이때 미국 금융가를 장악하고 있던 유태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미국의 대 부호이자 유태인이며 프리메이슨(freemason)인 제이콥 헨리 시프(Jacob Henry Schiff)라는 사람에게

긴급히 전쟁비용을 마련해 줄 것을 요청하자.

 

 

 

헨리 시프가 말하기를

나는 유태인이며, 전 미국유태인협회 회장과 미국 금융재벌인 쿤 로이프사의 총지배인을 맡고 있다.

우리유대민족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박해를 받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러시아의 박해가 가장심하다.

나는 러시아가 우리민족을 학살하는 것을 중지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아직 효과가 없다.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러시아에 있는 우리유태인들이 살아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러시아의 마지막황제 니콜라이2세(Nikolai)때 유태인박해가 가장 극심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러일전쟁에서 전사한 유태인병사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비겁한 슬라브인은 유태인병사를 항상 선두에 세워 일본군의 총알세례를 받게 했다.』는 내용으로

이 병사는『유태인에 대한 학대는 극심했고, 그 학대의 대가가 귀중한 생명이라는 것이 더욱 고통스럽다.』라고 섰다.

 

 

 

이러한 비참한 유대병사의 슬픈 사연이 미국에 있는 유대민족들에게 알려지면서

분노에 쌓인 헨리 시프는 미국 내셔널 시티은행이 일본국채를 모두 인수하도록 적극 도와주었다.

헨리 시프가 러일전쟁기간 중 일본정부에 빌려준 돈은 모두 2억 달러에 이르렀고

이 군자금으로 일본은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러일전쟁이후 헨리 시프는 일본천왕으로부터 일등훈장을 받았다.

 

 

프리메이슨(freemason) 이란 : 18세기 영국의 석공(메이슨)의 조합으로 시작되었다.

그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지식인과 중산층의 조직으로 발전하였고, 한때는 카톨릭의 비밀결사대적인 성격을 가졌다.

역대 유명 인사나 최상류층, 돈 많은 사람, 지식인의 모임으로 각국의 몇몇 대통령이나 기업인 정치인등으로 구성되어있다.

 

예를 들면 지구가 멸망하는 상황에서 2백 명만 살 수 있다면. 거기에 포함될 정도의 특권층으로.

'프리메이슨 하부 조직의 한국인 명단'으로 총 15명이 있다.

 

 

조석래, 효성그룹회장.

정몽준, 국회의원.

한승주, 전외무부장관 전미국대사.

홍석현, 중앙일보사장 전미국대사.

현홍주, 전미대사 김&장 법률사무소.

현재현, 동양그룹사장.

김기환, 골드만삭스 국제자문.

김경원, 전 유엔대사 김&장 법률사무소 위촉이사.

구자홍, LS그룹회장.

이홍구, 전국무총리.

이인호, 명지대교수 전핀란드 러시아 대사.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경숙, 이명박 대통령인수위원장 숙명여대총장.

류진, (주)풍산 CEO

사공일, 전재경부장관.

 

셋째 : 조선친일파의 협조로 일본이 러일전쟁을 승리했다.

 

명성황후가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일본자객에 의해 시해당하고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이 승리하자

고종황제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러시아를 끌어 들이게 되었고

이때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고종임금이 러시아대사관에 1년 동안 숨어 지내게 된다.

 

일본은 조선에서 청나라 군대를 몰아내고 그 힘으로 조선을 침략하려고 하자

고종황제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러시아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를 분노케 하고 가슴 아프게 한 일이 러일전쟁 때 발생했다.

러시아는 35만의 대군을 몰고 조선반도를 향해 진입해 들어오자,

일본은 만주봉천(瀋陽)에서 더 이상 조선으로 러시아군이 접근해오지 못하도록 저지하였고,

만주봉천에서 일본군과 러시아군이 맞붙게 되어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당시 러시아의 군사력은 450만 명이었으며

일본군병력은 85만으로 러시아의 군사력이 일본에 비해 5배 이상 압도적으로 막강했다.

만주봉천에 주둔한 러시아극동군은 35만 명으로, 일본군의 기본전략은 러시아의 증원 군이 오기 전에.

일본군 25만 명이 러시아극동군을 섬멸한다는 작전이었다.

 

러일전쟁초기 만주봉천전투에서 먹느냐 먹히느냐 마지막까지 치열한 혈전(血戰)이 벌어졌다.

 

 

이때 일본군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한반도에서 항. 일 폭동이 일어나는 것을 제일 겁냈다.

 

그 당시 일본군은 25만의 병력을 만주봉천에 투입시켰는데 만약 한반도에서 항일폭동이 일어나,

철도를 끊고 군용 통신시설을 끊으면 일본군은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위기에 처해있었다.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으로 일본과 만주를 연결하는 다리역할을 하고 있는데 다리가 끊기게 되면 철도가 끊기게 되고

또한 식량과 군수품인 병참기지가 끊기게 되고 군용전신선이 끊기면 통신두절로 만주에 있는 일본군 25만 명은 완전히

독안에든 쥐가 된다.

 

 

 

그리고 조선에서 항일폭동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러시아군이 알게 되면 사기가 충천해져서 끝까지 싸우게 되어

일본군 25만 명은 완전히 만주봉천에서 전멸하게 되어있었다. 이러한 최악의 시나리오를 일본군 참모부에서는 가장 두려워했었다.

 

 

 

그 당시 조선에서는 함경북도종성. 북청. 부경계곡에서 사냥꾼인 포수들이 소규모의 항일반란을 일으켜 일본군대의 막사를 습격하고, 군용전신선을 끊는 등 산발적으로 저항이 일어났었다. 이러한 항일무장투쟁이 전국적인 규모로 조직적으로 일어났었다면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더 이상 치룰 수 없는 상태에서 꼼짝없이 패전하여

막대한 전쟁배상금까지 변상하게 되면 최소한 30~50년 동안 일본이 재기(再起)할 희망이 없어지게 되어있었다.

 

그 사이, 30~50년 동안 한국에서 부국강병(富國强兵)에 노력했더라면 조국의 분단도 없었고

동양(東洋)에서 제일 강국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놓친 것이다.

 

일본은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위해 반민족적 친일분자들인 이용구(李容九). 송병준(宋秉畯) 등을 선동해서

일진회라는 친일단체를 만들어 친일파들은 경성에서 신의주까지 경의선 철도를 놓아주고

끊어야 할 기찻길을 만고의 역적 친일분자들은 앞장서서 기찻길을 놓아주고

군용전신선을 한국의병들이 끊을까봐 경비를 서주었다.

 

 

 

그 결과 1905. 9. 16 러시아가 일본에 패전하고

곧바로 2개월 후인 11월 17일 조선은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는 을사5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러일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조선은 친일파에 의해 나라가 망하게 된다.

 

일진회는 왜 일본군에게 적극 협조해서 경의선 철도를 놓았는가?

 그 원인을 살펴보면! 갑오 동학농민 혁명이후.

(동학군에는 농민뿐만 아니라 유생. 선비들도 많이 참여 하였다.)

동학군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조선정부로부터 가혹하게 박해(迫害)를 당했다.

 

일본군 또한 동학군을 반란집단으로 몰아 처참하게 죽이자

살아남은 일부 동학군들은 일본사람들의 보호를 받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가 없어서

일본사람들의 보호를 받아 혹시 목숨이라도 건지기 위해

조선정부의 박해를 면할 목적으로 일본군과 결탁하여 친일단체인 일진회를 조직하게 되었고

일본은 이러한 약점을 악용했다.

 

 

 

근대문학소설의 효시라고 불리는 혈(血)의 루(淚)의 작가 이 윤직은 이완용의 비서였는데,

어느 날 한밤중에 일제통감부 외사국장인 고마스를 찾아갔다.

통감부는 외교권을 갖고 있었는데 외사국장은 오늘날 외교부장관에 해당하는 직책이었다.

 

 

 

이 윤직이 고마스 외사국장을 한밤중에 몰래 찾아와서 하는 말이

『일본이 조선을 합방하는 것이 하나도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우리조선은 원래 청나라의 속국으로 수백 년 간 지내왔는데 중국이 청일전쟁에서 패했으니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는 것은 당연한 순리라면서

 

우리가 일진회보다 앞장서서 주도적으로 일본과 합방을 추진하는 과정에 최고 공로를 세워야 하는데

조선과 합방이후 일본이 우리에게 어떻게 대우를 해줄 것인지 궁금합니다.』라고 묻자!

 

 

 

고마스가 대답하기를

『일본과의 합방에 적극 협조해준 대신(大臣)들을 전부 귀족으로 대우하고 지금현재 갖고 있는 직위보다

더 높은 벼슬을 보장해주고. 일본이 특별예산을 편성해서 한일합방에 공로를 세운사람들의 등급에 따라

막대한양의 은사금을 지급해 줄 것이니 아무걱정하지 말라.』고 약속을 했다.

 

 

 

이 말을 들은 이 윤직이 미친놈처럼 너무 좋아서 웃음을 참지 못하고 이완용에게 단숨에 뛰어가서 보고를 했다.

그러자 이완용은 한술 더 떠서 조중훈과 함께 데라우치(寺內正毅)통감을 만나서 고종황제의 직위를 어떻게 할 거냐고 묻자

고종을 이왕(李王)으로 정할 것이라고 데라우치 통감이 말을 하자

 

이완용이 말하기를『왕 대신 대공(大公)으로 하면 어떻겠습니까!』라고 말을 했다.

대공은 왕의 한 등급아래인 왕과 공작사이의 중간계급을 말하는 것이다.

 

 

데라우치 통감은 그래도 고종임금을 왕으로 대우해 줘야하지 안느냐고

일본이 오히려 강요를 해서 고종을 왕으로 만들어 준 것이다.

 

 

 

1910년 8월29일 조선이 망하고 난 다음에 1910년 10월 조선인들이 나라 팔아먹는데

큰 공로를 세운 76명이 귀족으로 임명을 받고 막대한 은사금을 받았는데

그중에 큰 틀에서 두 가지 부류로 분류 가되었다.

 

첫째 :

왕족으로 대원군의 아들과 조카 조선왕실의 친척세력과 심지어 순종의 장인 인 해풍부원군 윤택영(尹澤榮)까지 포함되어있었다.

둘째 :

당파로 분류된 북인 2명, 소론 6명, 나머지 90%가 노론세력으로 56명이 작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출처:http://cafe.daum.net/inwhamo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