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Korea Culture/history

‘백조일손 역사관’ 제주 예비검속 비극

by lisa311 2024. 8. 25.

박미라 기자 2024. 8. 25. 

 

“132명이 한 날, 한 시, 한 곳에서 죽어 엉기었으니…

” 제주 예비검속 비극 ‘백조일손 역사관’ 문 열어 

한국전쟁 발발직후 예비검속 섯알오름서 집단학살·암매장 유족 청원 6년만에 유해수습 허가

 

제주특별자치도와 백조일손유족회(회장 고영우)는 지난 10일 서귀포시 대정읍 백조일손 묘역 인근에서

역사관 개관식과 제74주기 백조일손·행방불명인 영령 합동위령제를 봉행했다.

 

이날 개관식에는 오영훈 지사와 이상봉 제주도의회 의장, 김광수 제주도교육감, 위성곤 국회의원,

김창범 제주4·3희생자유족회장, 유족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제주 예비검속 백조일손 역사관이  2024. 7.10일 개관했다. 박미라 기자

 

4.3공동체 정신의 상징 '백조일손' 묘역은 모두가 하나의 자손으로 서로의 아픔을 보듬고,

슬픔을 이겨낸 공동체 연대의 상징”이라며 “백조일손 역사관은 희생자 추모 공간이자 올바른 역사를 알리는 기념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전쟁 직후 예비검속됐다가 섯알오름에서 집단 학살된 제주도민을 추모하고 알리는 역사 공간이 생겼다.

백조일손 유족회는 이달 초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백조일손 묘역 바로 옆에 ‘제주 예비검속 백조일손 역사관’을 개관했다고 25일 밝혔다.

 

이날 찾은 역사관은 전시실과 영상실, 위패봉안실, 자료실 등으로 구성된 331㎡ 규모의 아담한 단층 건물로, 개관 초기인 탓에 아직은 관람객이 많지 않은 한산한 모습이었다. 역사관은 제주4·3사건의 일부이자 국가공권력에 의한 또 다른 집단학살인 섯알오름 학살 사건의 전 과정과 백조일손 유족회의 진실규명 과정 등을 상세하게 보여준다.

 

역사관은 입구에서 4·3과 한국전쟁, 예비검속에 대한 간략한 설명 이후 본격적으로 모슬포 경찰서 관내 예비검속과 섯알오름 학살 사건을 다뤘다. 당시 군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뚜렷한 기준없이 예비검속한 주민들을 1950년 8월20일 섯알오름으로 끌고가 재판절차도 없이 집단총살하고, 암매장했다.

 

이날 새벽 2시쯤 섯알오름 남쪽 구덩이에서 한림 및 무릉지서에 구금됐던 주민 60여명이, 새벽 5시쯤 모슬포 절간고구마 창고에 구금됐던 주민 130여명이 총살됐다.

 

유족들은 당시 단 한 구의 시신도 수습하지 못했다가 6년여 만인 1956년에야 섯알오름 구덩이에서 유해를 거뒀다.

시신이 뒤엉켜 구분할 수 없었던 만큼 칠성판 위에 머리뼈, 등뼈, 팔뼈, 다리뼈 등을 짜 맞춰 유해 132구를 수습했다.

유족들은 유해를 상모리 장지에 합동 안장하고, ‘132명의 조상들이 한 날, 한 시, 한 곳에서 죽어 뼈가 엉켜 하나 됐으니

후손들 모두 한 자손’이라는 의미를 담아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라고 묘역의 이름을 지었다.

 

역사관 해설사는 “영상실의 벽면에 희생자의 명단을 가로세로로 교차해 얽혀 새긴 것은 발굴 당시 유해들이 뒤엉켜 있었고 백조일손이 된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예비검속과 집단학살의 가해자를 정리한 전시물. 박미라 기자

 

 

역사관 한 벽면에 희생자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발굴 당시 유해들이 뒤엉켜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름 속 같은 글자를 공유하는 방식으로 이름을 새겨 넣었다. 

 

앞으로 예비검속부터 백조일손 유족회의 진실규명 활동에 이르기까지 섯알오름 양민 집단 학살사건의 실체를 규명하고, 미래 세대에게 평화와 인권의 중요성을 알리는 교육공간으로 활용된다.

“백조일손 묘역은 모두가 하나의 자손으로 서로의 아픔을 보듬고, 슬픔을 이겨낸 공동체 연대의 상징”이라며

“백조일손 역사관은 희생자 추모 공간이자 올바른 역사를 알리는 기념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내년에는 4·3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돼

제주4·3의 화해와 상생의 가치가 미래 세대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태평양전쟁(1941~1945) 당시 일본군은 섯알오름 일대에 알뜨르비행장과 동굴진지, 고사포진지를 구축했다.

또 섯알오름 내부를 깊게 파낸 후 탄약고를 조성했다.

일제가 패망하자 미군은 탄약고를 폭파하면서 오름 절반이 무너지고 큰 구덩이가 생겼다.

이 구덩이는 제주 4·3사건 당시 양민들을 집단 매장한 학살터로 이용됐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계엄당국은 4·3당시 중산간에 피신했다가 자수한 양민 등 820여 명을 예비검속이란 명목으로 강제 연행 후 구금했다.

모슬포경찰서 관내 한림·한경·대정·안덕지역에서 252명이 연행됐고, 이 중 132명은 1950년 8월 20일 새벽 섯알오름 탄약고 터에 끌려가 총살당했다.

희생자 중에는 공무원, 교사, 학생, 농민, 우익단체장도 있었다. 당시 군인들은 민간인들을 섯알오름 구덩이에 일렬로 세워놓고 총살한 후 돌무더기를 쌓아 암매장했다. 군경은 6년간 이곳을 출입금지 지역으로 설정, 유해 수습을 막았다.

1956년 군부대 확장 공사로 일부 유해가 드러나면서 사건 발생 6년 만인 1956년 6월 유족들은 허가를 받고 시신을 수습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희생자 132명의 유해는 누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학살터에서 진행된 유해발굴에서는 희생자의 유골과 의류, 신발에 이어 실탄 1700여발이 나왔다

유족들은 발굴된 뼈를 추슬러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유족들은 132구의 시신을 한곳에 안장한 후 비문에는 ‘조상은 100명이 넘되 자손은 하나’라는 의미로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라는 비석을 세웠다.

제주도는 2005년 섯알오름 학살터를 4·3주요 유적지로 지정했고, 2006년부터 학살터 부지를 매입해 추모시설을 건립했다.

.

 

좌동철 기자

경찰 지시로 산산조각 난 백조일손지지 비석이 역사관에 전시돼있다. 박미라 기자

 

 

전시실 한 가운데에는 깨진 비석의 돌 무더기가 놓여있다. 이는 묘역의 해체를 압박하던 경찰이 1961년 대정지서 급사를 시켜 해머로 산산조각 낸 백조일손지지 비석의 잔해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역사관에는 유해 발굴 당시 학살 현장에서 나온 신발창, 총알 구멍이 있는 옷, 총살 당시 쓰인 탄피 등의 실물도 고스란히 전시됐다. 당시 민간인이 실려가는 트럭을 목격해 비밀리에 진행됐던 학살을 마을에 알린 주민의 증언 영상, 유족들이 국회에 보냈던 탄원서, 희생자들의 생전 모습을 담은 사진들도 벽면을 촘촘히 채웠다. 주민들이 트럭에 실려 섯알오름으로 끌려가고, 학살되는 과정 등은 샌드애니메이션으로 구현해 관람객의 이해를 돕고 있다.

 

아버지를 잃은 백조일손 유족으로 미국과 제주를 오가며 4·3과 한국전쟁 직후 민간인 집단학살의 진상규명에

힘써온 '이도영씨'의 생애와 생전 모은 연구자료도 만나볼 수 있다.

 

이같은 역사관 조성은 유족회 차원에서 꾸준히 섯알오름 학살 진상규명 활동을 벌여왔고,

상당수의 자료를 모아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수장고에는 미처 전시하지 못한 자료가 상당수 있다.

 

고영우 백조일손유족회장은 “역사관은 국가 공권력에 의해 부당하게 희생당한 학살의 비극을 후손들에게 알리고

올바른 역사를 교육하는 장소가 되길 바라는 유족의 염원이 담긴 장소”라면서 “이를 위해 유족회 소유 땅을 기부채납 했고, 앞으로 더욱 많은 자료를 전시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