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동포연대 http://utoro.kin.or.kr/about/about01.php
1940년 1월 | 교토비행장 용지가 좌산촌을 중심으로 하는 구역으로 결정됨 |
1941년 7월 | (주)일본국제항공공업 설립 |
1941년 8월 | 교토부가 우토로 토지를 매입 우토로에 한바(건설현장에 만들어지는 집단합숙용 가건물)가 만들어짐 |
1945년 7월 | 일본 패전, 비행장 건설 중지, 1300여명의 조선인 노동자와 가족이 방치됨 |
1945년 9월 | 미점령군(GHQ) 일본국제항공공업 접수 우토로 한바는 주민의 저항으로 접수되지 못함 우토로에 조선인학교가 자주적으로 건립됨 |
1945년 12월 | 일본국제항공공업 사장이 A급 전범 용의로 연행됨 |
1949년 12월 | 일본 정부의 탄압에 의해 우토로 조선인학교 폐쇄 |
1950년 6월 | 한국전쟁 발발. 전쟁 특수에 의해 일본 산업 부흥 |
1951년 5월 | 주민이 우지시에 생활 곤궁에 대한 규제를 호소함 |
1952년 3월 | 일본 경찰부대가 2회에 걸쳐 우토로를 강제 조사 |
1953년 9월 | 태풍으로 큰 침수 피해 |
1957년 2월 | 육군 자위대 오쿠보 주둔부대가 발족(우토로지구와 맞닿아 있음) |
1971년 6월 | 일본국제항공공업의 후신 (주)닛산차체 성립 |
1987년 3월 | 닛산차체가 우토로 토지를 매각 |
1989년 2월 | 서일본식산이 ‘건물수거 투지명도' 소송 제기 |
1989년 3월 | 교토지법에서 첫 공판 ‘우토로를지키는모임' 결성 |
1998년 1월 | 교토지법 패소 판결, 고법에 항소 |
1998년 8월 | 일본 정부가 유엔 사회권규약위원회에 2차 정부보고서 제출 |
1998년 12월 | 오사카고법 패소 판결, 최고재판소(대법원) 항소 |
2000년 | 최고재판소 기각 결정 |
2004년 1월 | 우토로 토지 등기부에서 소유자가 서일본식산에서 한 개인으로 변경됨 |
2004년 4월 | 우토로를지키는모임'이 우지시에 고령자의 실태조사를 제안 건물해체업자가 우토로에 빈번하게 왕래함 |
2004년 9월 | 주일한국대사가 교토부 지사에게 선처를 요청 |
2005년 2월 | 한국의 NGO, KIN(Korean International Network, 지구촌동포청년연대) 우토로 실태조사 |
2005년 4월 23일 | 우토로문제를생각하는국회의원모임'우토로 시찰 |
2005년 4월 27일 | ‘역사청산!거주권보장!우토로국제대책회의'발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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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이 재일 조선인 마을로 형성된 것은 1941년 제2차 세계대전 중 교토 군비행장 건설을 위해 일본 정부에 의해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가 한바(노동자가 집단으로 합숙하던 가건물)를 만들어 생활하면서부터 입니다. 6000평(21,000평방미터) 가량의 면적에 1300여명의 조선인이 살았던 우토로는 처음에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
조국을 떠나 우토로에 들어오게 된 경위는 다양합니다. 강제징용으로 일본으로 끌려왔다가 우토로로 흘러 들어온 사람, 일본군 징용을 피할 수 있다고 해서 노무를 선택한 사람, 큰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거짓 선전으로 이주해 온 사람 등 요컨대 총칼 앞에서 강제 징용 당하거나, 논밭을 빼앗기는 등 생계수단을 빼앗겨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도일해 온 사람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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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적취득자를 포함한다면 약 200만에 이르는 재일조선인의 존재는 1910년 한일합병과 1945년 해방될 때까지의 일제 식민지 통체에 의해 형성되었다. 지금도 재일조선인이 안고 있는 갖가지 문제점들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35년간의 식민지 지배에 뿌리를 둔 것으로, ‘우리들에게 있어 식민지 지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재일조선인들의 호소는 아직도 청산되지 않고 있는 과거사의 연장선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 대한 경종이자, 재일조선인의 존재가 바로 역사의 현상적 실체임을 보여주고 있다. |
1910년대 일제의 무단정치 하에 실시도었던 토지조사사업에서 비롯된다. 당시 식민지 경제정책의 중심이었던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조선의 농촌 경제는 커다란 구조적 변화를 겪었고 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하던 농민층이 몰락해갔다. 일제는 토지의 소유권이 실질적인 경작자인 농민이 아닌 연고를 신고하는 자에게 인정함으로써 약 3%에 불과한 지주들이 전체 경지 면적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거나 국유화되는 사태가 빚어졌고, 저절로 대다수의 농민은 중국 동북지방과 시베리아, 일본 등 해외로 유출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편, 1914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군수물품 수출로 호황을 누리던 일본은 노동력 부족과 임금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조선인 노동자를 모집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인의 일본 도항은 1920년대부터 비약적으로 증가하였는데 1920년대 약 3만여 명에서 1930년에는 거의 30만 명에 육박하였다. 1923년 관동대지진 때에 6천 명 이상의 조선인 학살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항이 계속된 것은 춘궁농민 문제 등 농촌 전체가 갈수록 피폐 일로를 걸었기 때문이었다. 이들 이농자들의 출신을 보면, 경상남도, 경상북도, 전라남도의 3도 출신이 많았고, 주로 도항비만이라도 마련할 수 있는 자작농이었다. 이들은 공업과 탄광이 집약되어 있던 기타큐슈의 후쿠오카현, 오사카, 도쿄, 아이치현 등 공업지역과 탄광지대를 중심으로 ‘조선인마을'을 형성하며 거주하였다. 출신 분포와 거주 분포는 현재까지도 비슷하게 이어지고 있다. |
병참기지화 정책 하에 공업화 정책이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되었고 조선인 노동자의 수도 급속하게 증가하였다. 동시에 일본 국내에서는 재류중인 조선인에 대한 황민화, 동화(同化) 정책이 친일단체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진행되었다. 이어 조선인에 대한 강제연행이 시작된 것은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과 1941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에 의한 것이었다. 일제는 전선의 확대에 따른 병력 추가와 본토에서의 전시 산업을 뒷받침하기 위해 더 많은 노동력을 동원해야만 했다. 강제연행된 조선인 노동자들은 토공, 직공, 광부로 일하면서 특히, 노동 재해가 빈발한 장시간의 위험한 육체노동에 배치되었고, 그 중 60%는 탄갱과 광산에서 일하였다. 비바이라는 곳의 한 탄광에서는 415명 중 1943년에 101명 , 1944년에 188명, 1945년에 113명이 각각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모는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사상자가 많았을 것임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또한, 태평양 전쟁 후반기에 들어 미군의 공습에 의한 동남아시아 등 해외로 연행된 조선인의 피해는 말할 것도 없지만, 일본 내의 공업지대 전시산업에 취업하고 있던 조선인들의 공습에 의한 피해도 급격히 늘어났다. 원폭투하 진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는 원폭 사망자와 피해자가 속출하였다. |
강제연행된 자는 총 66만 여명으로 군인, 군속 인원 36만 여명과 사할린, 남양 등지로 연행된 72만 여명을 포함하면 이 때에 해외로 연행된 조선인은 100만 명을 훨씬 웃도는 숫자였다. 결과적으로 1945년 8월 전쟁이 종료되는 당시 일본에는 조선인 전체 인구의 약 10분의 1에 해당하는 200만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1945년 일본의 패망 이후조선인의 귀국행렬은 1950년 한국전쟁 때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연합국총사령부(GHQ)와 일본 정부는 귀국을 희망하는 조선인들의 소지 금액과 소지품의 무게를 극도로 제한하는 정책을 실시함으로써 사람들의 발길을 주저하게 하였다. 강제연행된 사람들은 대부분 돌아간 것으로 추정되나 이미 고국에서 생활기반을 상실한 이들은 일시 귀국 후 다시 일본에 돌아오거나 귀국을 포기하기도 하였다 1947년, 칙령으로 외국인등록령이 공포되고 재일조선인은 하루 아침에 황국신민에서 외국인으로 분류되어 참정권과 같은 기존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감시와 관리의 대상으로 취급되면서 제반 제도에서 철저히 배제되기 시작하였다. 더불어 사회적 인습적인 차별은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뿌리깊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1947년 12월까지 약 60만 명의 조선인이 외국인등록을 하였고 이들이 바로 지금의 재일조선인의 원형이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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