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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Culture/history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를 만든 나라는?

by lisa311 2013. 12. 28.

 

 

 

[서울시 하이서울뉴스]

세계 인쇄역사상 가장 먼저 금속활자를 발명하여 사용한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우리조상들은 이미 고려시대인 13세기에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들어 사용했다.

금속활자는 조선 초기 태종부터 더욱 개량되어 태종 3년에 계미자, 세종 3년에 경자자, 세종 16년에 갑인자가 차례로 주조되어 서적출판에 사용되었다. 그 중에서도 갑인자는 글자 모양이 특히 아름답고 인쇄하기 편하도록 주조되었으며 활자가 20여만 개나 되는 가장 우수한 금속활자로 손꼽힌다.

 

활자를 만드는데 사용된 금속도 처음에는 납이었으나 세종 18년부터 납보다 강한 구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루에 만들어낸 활자 주조수량도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만든 수량보다 10배나 많은 3천 5백자 정도나 되었다.

 

활자에 사용된 금속뿐만 아니라 조판도 발전했다. 종전에는 조판으로 밀을 써서 활자를 고정시켰다. 그러나 갑인자를 사용한

세종 때부터는 식자판을 조립하는 방법을 창안하여 종전보다 두 배나 빠르게 인쇄 효율을 높였고, 인쇄된 글씨도 훨씬 선명하게 되었다.

 

 

옛날에 책을 출판하는 과정을 그려 걸어놓은 족자

 

세종시대의 학자 변계량이 쓴 갑인자발(甲寅字跋)에 의하면 '인쇄되지 않은 책이 없고, 배우지 않은 사람이 없다' 라고 했다.

물론 상당히 과장된 표현을 한 것이지만 조선 초기의 높은 출판문화 수준을 말해주는 내용임에 틀림없다.

조선시대 금속활자의 주조를 담당한 관청이었던 주자소 터는 서울 중구 충무로 3가 큰길가에 작은 표지석으로 남아 있다.

표지석에는 '주자소 터, 이곳 주자동은 조선 태종3년(1403)부터 정조 24년(1800)까지 금속활자를 부어 만들던 곳' 이라 쓰여 있다.

 

고려시대부터 찬란하게 꽃피웠던 금속활자 인쇄문화는 조선개국이라는 전환기를 겪으며 잠시 주춤했다.

그러나 3대 임금인 태종 때 주자소를 설치하고 승정원 소속으로 예문관대제학 이직과 총제 민무질, 지신사 석명, 우대언 이응 등으로

하여금 다시 금속활자를 만들게 했다.

 

이때 만들어진 활자가 조선 최초의 금속활자인 계미자다. 이 계미자를 만들어낸 곳이 바로 당시 한양 훈도방에 있던 주자소로 지금 표지석으로 남아 있는 현장인 것이다. 그러나 주자소는 1435년(세종 17) 경복궁으로 옮겼고, 1460년(세조 6)교서관으로 소속을 바꾸고 관청 이름도 전교서라 개칭했다.

 

 

 

직지란 "직지인심견성성불"에서 온 말로써, 참선하여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볼 때 그 마음의 본성이 곧부처니

이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뜻으로 직접 다스린다/바른 마음/직접 가리킨다/정확하게 가리킨다의 뜻으로 쓰인다.

 

고려시대에 이어 조선시대에도 찬란하게 꽃피웠던 금속활자 인쇄문화

세종실록에는 1434년에 주조된 갑인자의 활자주조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임금께서 처음으로 주자소를 설치하시고 큰 글자를 주조할 때 조정 신하들이 모두 이룩하기 어렵다고 했으나,

주상께서 억지로 우겨 만들게 하고, 모든 책을 인쇄하여 중외에 널리 배포했으니 이 또한 거룩하지 아니 한가"라는 기록이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주자소의 직제는 정3품아문이었다.

 

다른 관직을 겸임하는 판교 1명, 교리 1명, 별좌와 별제, 그리고 박사 2명, 저작 2명, 정자 2명, 부정자 2명의 관리가 있었다.

실제로 인쇄를 담당한 장인으로 금속활자를 만드는 야장 6명, 글자를 나란히 배열하는 균자장 40명, 인쇄를 담당하는 인출장 20명,

글자를 주조하는 각자장 14명, 구리를 주조하는 주장 8명, 주조된 활자를 다듬는 조각장 8명, 인쇄 판형에 필요한 회양목을 다루는

목장 2명, 종이를 재단하는 지장 4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인쇄전문가 집단인 장인의 구성은 금속활자의 주조에서 책자 인쇄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이 전문 분야별로 분업화되어 있었다.

활자를 주조할 때는 임시로 설치한 주자도감이나 지방 감영, 또는 수어청에서 만든 후에 교서관으로 옮겨 인쇄하는데 사용하였다.

조선 중기를 지나 정조 때 이르러 규장각을 내각, 교서관을 외각으로 삼아 필요한 서적들을 편찬했다.

 

1794년에는 창경궁 안 홍문관 자리에 교서관을 새로 설치하여 감인소로 개칭했다가 태종 때의 옛 이름인 주자소로 다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당시 주자소에서 주조했던 금속활자 일부가 용산구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직지를 인쇄한 금속활자가 어떻게 만들어져 사용했는지에 대해 자세히 보실 수 있다.

글자본 정하기/밀납 정제하기/밀납 만들기/금속화자 만들기/조판하기/이쇄/교정/책 꿰매기등 전 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재현해 놓았다.

 

구텐베르크 성경’이 출판되기 전까지는 한 권 필사하는 데 2개월이 걸렸다. 그런데 500권을 인쇄하는 데 1주일도 걸리지 않게 됐다. 책이 널리 보급되자 문자문화의 영향력이 확산됐고 지식의 대폭발이 일어났다.

구텐베르크의 성서보다 200년이나 앞서 금속활자를 발명한 우리나라에서는 왜 인쇄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많은 요인이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문자계급에 의한 지식의 독점이었다.

성현의 가르침은 대량 복제하지 말고 붓글씨로 정성들여 쓰면서 배워야 한다는 유교적 세계관이 작용했다.

서예가 발달한 나라에서 인쇄술이 힘을 못 썼다는 얘기도 그래서 나왔다. 활자 주조와 인쇄를 중앙 관청이 맡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인쇄술을 통해 대중에게 지식을 널리 보급한 서양과는 대조적이었다.

앞선 기술은 가졌지만 사회변화까지 이끌지는 못했으니 ‘금속활자를 가장 먼저 발명한 게 우리’라고 자랑하는 것도 멋쩍다.

‘직지’보다 138년 이상 앞선 증도가자(證道歌字) 11개가 어제 추가로 공개돼 눈길을 끌었다. 그간의 진위 논란에도 마침표를 찍을 유물이라니 관심이 크다. 만약 세계 활자사를 새로 쓰게 된다면 이를 계기로 활자뿐만 아니라 기술과 사회혁신의 진정한 의미까지 되돌아볼 일이다.

 

청주고인쇄박물관 http://jikjiworld.cjcity.net/main/jikjiworld

 

서울 디지털 포럼” 기조연설에 나선 美 엘고어 전 부통령의 한마디(아래 참고)가 이슈가 된 적이 있습니다.
독일의 쿠텐베르크 금속활자보다 고려의 금속활자가 일이십년도 아니고 무려 2백여년을 앞서며
독일 쿠텐베르크 금속활자 기술이 고려에서 전수된 것이라는 증언이 나왔는데도....

즉 금속활자 세계 1등은 한국인데 왜 적극적으로 홍보를 하여 정정을 하지 않는지 모를 일입니다.
아래 글을 읽어보시고 관심있는 분들의 많은 노력을 희망합니다.

다른 나라에서 이런 사실을 보면 우릴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
“재들 나라는 바보들만 사나....세계 최고가 있으면 뭐하나...” 어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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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금속활자는 독일의 쿠텐베르크 금속활자보다 무려 200여년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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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美 엘고어 전 부통령 발언내용 : “서울 디지털 포럼 2005. 5.19 기조연설”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디지털 혁명은 커뮤니케이션 부문에서 인쇄술에 이어 세계에 주는 두 번째 선물이다"
"서양에서는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당시 교황 사절단이 한국을 방문한 이후 얻어온 기술이다"
"(이러한 사실은) 스위스의 인쇄박물관에서 알게 된 것이다"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할 때 교황의 사절단과 이야기했는데 그 사절단은 한국을 방문하고 여러가지 인쇄기술 기록을 가져온 구텐베르크의 친구였다"

* 관련기사 www.hani.co.kr ?http:>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35331.html

→ 엘고어가 이사실을 밝힌때가 2005년 5월 19일 인데 이후 반응이 별로 없다.
기가막힌 일 아닌가 ?
전 세계인들이 우리나라 금속활자가 세계최고라고 칭송하는데 정작 당사자인 우리는 먼말인지 모르고 “멍” 때리고 있다는 것이다.

→ 최근 청주시에서 노력을 하고 있는데 그 정도로는 안된다. 정부차원에서 활동해야 한다.


② 쿠텐베르크 금속활자 : 1455년, 1377년 제작된 고려 “직지”보다 78년 늦다.

독일 활판인쇄술의 창시자 요하네스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가 1455년 C. 후에리의 원조로
인쇄공장을 재건한 후 금속활자를 사용한 성경을 출판하는데 이를 쿠텐베르크 성경이라고 한다.
라틴어 역(譯)으로 36행 성경과 42행 성경이 있다.

→ 우리에게 배워가서 만들었는데 무슨 세계최초인가? 한심하다.


③ 고려의 금속활자 : 1200년대부터 존재. 1377년 제작된 “직지”가 쿠텐베르크 활자보다 78년 앞선다.

* 금속활자 : 놋쇠·납·무쇠 등을 녹여 부어 만든 활자. 일명 주자(鑄字)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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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32년 이전 : 고려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 (→ 쿠텐 보다 223년 앞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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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발문에 책을 찍게 된 사연을 밝히고 있는데,
몽골의 병화(兵禍)로 국도를 강화도로 옮긴 1232년(고종 19) 이전에 주자본(鑄字本)으로 찍었던 것을
1239년 강화도에서 책을 뒤집어 이것으로 목판(木板)을 새긴 다음 다시 찍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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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34년경 : 고려 “고금상정예문(古今詳定禮文)” (→ 쿠텐 보다 221년 앞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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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전하지 않으나, 1234년경 강화도에서 “고금상정예문(古今詳定禮文)” 28부를 찍었다고 한다.
이규보(李奎報)가 저술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채록된 “신서상정예문(新序詳定禮文)”의 발문에
“고금상정예문 50권을 주자(鑄字)로 인출(印出)하여 제사(諸司)에 분장(分掌)하게 하였다” 라고 적혀 있는 데서 알려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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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297∼1298년경 : “청량답순종심요법문(淸凉答順宗心要法門)” (→ 쿠텐 보다 157년 앞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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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도서관에 남아 있는데, 그 한 면이 금속활자로 찍혀 있다.
이 책은 원나라의 별불화(別不花)가 자금을 대어 찍었기 때문에 이 금속활자의 인쇄술이 원나라로 흘러들어간 것이 확실하다.
그것은 원나라의 왕정(王幀)이 쓴 “농서(農書)”에,
“1313년경 놋쇠로 활자를 만들었으나, 실용화하지 못해 다시 목활자를 썼다”라는 기록이 이를 증빙한다.

이로 미루어 원나라 때는 서양사람들이 드나들고, 아라비아 사람들이 이를 본받아 카드를 활자로 찍었고,
그 후에 종이의 제조법과 더불어 서양으로 금속활자 인쇄술이 전해졌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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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47년경 : 삼장문선(三場文選) (→ 쿠텐 보다 108년 앞섬) - 한문수 선생님 자료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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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원(元)나라가 주관한 국제 과거시험 준비 수험서였던 ‘삼장문선(三場文選)’에 사용된 활자가 고려시대의 활자라는 것.

1377년(고려 우왕 3년)에 간행된 현존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으로 인정받았던 ‘직지심경(直指心經)’보다 최대 30여 년 앞서 제작된 문서이다.

일찍이 미국의 저명한 인쇄문화 연구가 카터는
고려 말과 조선 초 무렵 ‘한국은 인쇄술에서 세계를 선도하고 금속활자의 사용을 고도로 발전’시켜
중국에 ‘역수출’까지 했다고 지적하면서, 활자 인쇄가 고려로 부터 유럽에 전해졌을 개연성은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단종 즉위 년이었던 1452년 8월 23일 명륜당에서는 성균관 수재들과 중국 사신들이 경전에 대해 강론하며,
우리 활자로 간행된 ‘삼장문선’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조선일보 보도내용]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공인받은 고려의 직지심경(=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1377년간)보다
30여년 앞선 고려의 금속활자본 '삼장문선'이 발견됐다.
1993년 1월 6일 상암문고가 "고려시대 서적원 간행의 '삼장문선'(원제 신간류편역거삼장대책)이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이라며 이 책을 공개했다.
출간연대는 1341년에서 1370년 사이로 '직지심경' 보다 짧게는 7년, 길게는 36년 앞서는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번에 확인된 고려 금속활자본의 활자들은 대-중-소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자 본문에 소자 두줄로 주석을 달아 인쇄할 수 있는 완벽한 체제를 보여 주고 있다.
또한 활자와 체제외에도 내용이 구본은 고려본, 신본은 조선본임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삼장문선'은 원나라에서 주관한 국제적인 과거시험(향시와 중서성 회시)의 대책문제를 뽑아 고시관의 비평을 곁들인 명답문집으로,
이 책에는 1314년에서 1335년까지의 출제가 들어있고 초간본은 1341년에 나왔다.
내용에 고려본인 구본은 경의를 표시하는 대두법을 사용, 원황제나 황실이 나오면 문장을 별행하고 있으나
조선본은 이를 무시, 출판국가가 다름을 확연하게 증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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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77년 :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 (→ 쿠텐 보다 78년 앞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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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
이 책은 1377년(우왕 3) 충청도 청주(淸州) 밖의 흥덕사(興德寺)에서 주자(鑄字)한 금속활자로 찍은 것임을 발문에서 밝히고 있다.

당시 고려에는 서적점(書籍店:書籍院)이라는 중앙관서가 있어 주자(鑄字) ·인서(印書) 등을 관장하였는데,
중앙관서가 아닌 한 지방의 사찰에서 이런 금속활자를 만들어 인쇄하였다는 사실은
당시 서적점에서는 이미 금속활자에 의한 인쇄술이 상당히 발달하여, 지방의 사찰에까지 그 기술이 파급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직지는 백운화상이 75세였던 고려 공민왕 21(1372)년에 노안을 무릅쓰고,
선도(禪徒)들에게 선도(禪道)와 선관(禪觀)의 안목을 자각(自覺)케 하고자 함은 물론,
선풍(禪風)을 전등(傳燈)하여 법맥(法脈)을 계승케 하고자 저술한 것으로서,
그 제자 석찬과 달담이 비구니 묘덕의 시주를 받아 청주 흥덕사에서 1377년 7월에 금속활자로 인쇄하였다.

직지는 2001년 9월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특급호텔 라마다플라자 청주호텔 엘리베이터안  직지심경 부조물

 

 

사진 http://cafe.daum.net/TheBloggers/iC2X/1?q=%B1%DD%BC%D3%C8%B0%C0%DA%B8%A6%20%C3%D6%C3%CA%B7%CE%B8%B8%B5%E7%20%B3%AA%B6%F3&r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