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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W-pop

Deep Purple

by lisa311 2012. 11. 22.

 

Deep Purple


흔히 레드 제플린과 함께 70년대 하드록의 양대산맥 중 하나로 불리우는 딥 퍼플의 역사는 1967년부터 시작된다. 당시 ex-Artwoods/The Flowerpot Men에서 최고의 키보디스트로 이름을 얻고 있던 존 로드(당시 27세)는 헤먼드 올갠을 통해 자신이 추종하던 바하의 대선율을 사이키 델릭 록으로 재구성해 보려 하고 있었고, 이미 Outlaws, Screaming Lord Sutch, Neil Christian & Crusaders에서 활동하고 있던 기타리스트 리치 블랙모어(당시 23세)의 정확한 기타솜씨라면 자기 꿈이 충분히 실현되리라고 생각했다. 리치 블랙모어는 곧 존 로드에 의해 밴드에 영입되었으며, 이로써 새로운 빅밴드는 탄생하게 되었다.

원래 이 밴드의 드럼은 보비 우드맨이었고, 보컬은 크리스 커티스, 베이스는 데이브 커티스였다. 하지만 1968년 2월의 순회공연이 끝난 후 밴드에 남은 것은 기타의 리치와 키보드의 존, 두 사람 뿐이었다. 두 사람은 오디션을 통해 나머지 3명의 멤버를 다시 뽑아야 했다. 이를 통해 영입된 이들이 이후 전설적인 드러머가 된 이언 페이스(당시 20세)를 비롯, 닉 심퍼(베이스)와 로드 에반스(보컬)였다.

애초에 이 밴드의 이름은 Concrete God 또는 Roundabout이었다. 하지만 1968년 4월 그들이 덴마크 투어를 가질 때 갖게 된 선상 인터뷰(오래된 이슈인 'Darker Than Blue'에 관한 것)에서 리치 블랙모어는 자기 할머니가 옛날 가장 좋아하던 노래의 이름을 떠올렸고, 그 이름을 따와 Deep Purple로 밴드의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딥 퍼플은 바닐라 퍼지를 모델로 하여 처음으로 자신들의 앨범('Shades of Deep Purple')을 만들었으며, 영국의 EMI, 미국의 테트라그러매이션과 레코딩계약을 체결하였다. 몇달 후 그들은 영국의 썬베리 페스티벌에서 처음으로 큰 공연을 가졌고, 9월에는 1집 앨범에서 뽑아낸 싱글 'Hush'를 발표했다. 'Hush'는 미국 차트 4위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했으며, 그들의 명성은 전세계에 알려졌다. 물론 앨범 자체도 차트 25위까지 올랐다.

1969년 초 티나 터너의 'River Deep, Mountain High'를 리바이벌한 2집 앨범 'The Book to Taliesyn'(탤리에신은 6세기 웨일즈 태생의 전설적인 시인)에는 바하의 추종자였던 존 로드가 필 스펙터의 걸작 'River Deep, Mountain High'에서 요한 스트라우스의 교향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도입부에 기발하게 삽입시키는 뛰어난 음악적 센스를 보였다. 여기서 딥 퍼플의 초기 음악성향은 사이키델릭이 아닌 심포닉 록임이 분명해졌고, 이를 계기로 딥 퍼플은 후에 클래식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의뢰받게 되었다.

1969년 7월에는 3집 앨범 'Deep Purple'이 발표되었다. 정말 눈부시게 빠른 속도로 3매의 앨범을 속속 발표한 것이다. 3집의 백미인 'April'은 비발디의 사계에서 '봄'을 연상케 하는 곡으로서 이후 3부 구성의 협주곡으로 로열 필과의 협연에서 프롤로그로도 사용되었다. 'April'은 레드 제플린의 'Stairway To Heaven', 킹 크림슨의 'Epitaph'와 함께 '3대 록 클래식'으로도 꼽힌다. 이 3집을 끝으로 로드 에반스와 닉 심퍼가 탈퇴하여 제1기 딥 퍼플은 막을 내리지만, 존 로드와 리치 블랙모어는 곧 Episode Six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안 길런과 로저 글로버를 각각 보컬과 베이스로 영입하였다.

9월에는 그들이 발표한 앨범 중 가장 모험적인 것으로 평가받는 4집 앨범 'Concerto For Group And Orchestra'가 발표되었다. 클래식과 팝의 장벽을 허물어 버린 이 51분 18초에 이르는 실험작은 물론 존 로드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러나 또다른 압권은 3악장에서 장시간에 걸쳐 자유로운 형태로 연주하는 드럼 카덴짜였다. 이언 페이스는 팀파니 주자를 무색케 할 정도로 타악기의 모든 것을 과시해 청중을 압도했다. 물론 이언 페이스의 드럼은 그의 우람한 덩치에 비해 볼 때 파워면에서 그리 특출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특유의 날렵한 스피드에 있어서는 거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한편 이 앨범에서 새 멤버 이언 길런과 로저 글로버는 차츰 밴드에 다이내믹한 화학작용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이때쯤 리치 블랙모어는 영국에서 거의 전능한 리드기타리스트로 떠오르고 있었다. 4집 앨범에서 이미 리치의 강렬하면서도 위압적인 기타연주는 오케스트라를 능가할 듯 자유자재로 펼쳐지고 있었으며, 여기에서 딥 퍼플이 심포닉 록에서 하드록으로 변신한다는 것은 그 조짐이 벌써 나타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1970년 10월 발표된 5집 앨범 'Deep Purple In Rock'이었다. 이 앨범은 영국 차트 4위를 기록했을 뿐 아니라 무려 1년 동안 상위권에 올라 있었고, 길런의 내지르는 듯한 쇳소리와 블랙모어의 흉포한 기타연주는 이 앨범을 헤비 록의 이정표로 평가받게 했다. 물론 3도에서 5도로 두드리는 존 로드의 해몬드 오르간 연주는 여전히 신기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헤비 메틀 밴드에 가장 적합한 목소리의 소유자로 평가받는 이언 길런의 절규는 앞으로 딥 퍼플의 음악적 방향이 어떤 식으로 갈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 앨범은 모든 곡이 나무랄데 없는 열기로 가득차 있고, 특히 'Black Night'과 'Strange Kind of Woman'은 영국에서 크게 히트했지만, 이 앨범에서 무엇보다도 압권은 'Child In Time'이었다.

로저 글로버의 베이스와 존로드의 차분한 하몬드 오르겐 소리가 영롱하게 울려퍼지며 'Child In Time'은 시작된다. 이어 이언 길런의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등장하더니, 음역이 한단계씩 올라간다. 마성의 보컬은 점점 높아지고 결국은 인간이 낼 수 있는 한계에 도달하려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여기에 기타사운드도 점점 강도를 높여 가며 보조를 마춘다. 곧 존 로드의 오르간 솔로가 바톤 터치하고 다시 리치 블랙모어 특유의 우아하면서도 힘찬 연주가 시작된다. 여기에 건반과 베이스는 저음역을 커버하며 곡의 중후함을 높인다. 화려한 솔로가 교대되면서 보여주는 곡의 엄청난 스케일. 딥 퍼플이 록음악의 새로운 장을 열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그 밖에도 'Speed King'은 곡 전체의 마치 몰아치는 듯한 속도감과 이언 페이스 특유의 순발력 있는 드러밍, 리치의 무겁고 힘 있는 연주가 딥 퍼플이 말 그대로 '속도에 있어서는 왕'임을 보여주는 곡이었고, 'Into The Fire'는 앨버트 킹에게서 전수받은 듯한 리치 블랙모어의 질질 끌면서도 다시 끊어주는 무거운 기타 톤과 함께, 강하고 분절화된 이언 길런의 곡소화가 막강한 힘을 느끼게 해주는 명곡이었다. 튕기고 뒤틀고 꼬아대는 멋이 잔뜩 느껴지는 'Black Night'도 여기서 빼놓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이 앨범 'In Rock'은 각각의 곡 이상으로 앨범 전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과 속도감이 엄청나며, 특히 투어공연으로 바빴던 탓에 거의가 라이브 녹음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선 많은 이들에게 경악을 금치 못하게 했다.

1971년 7월에는 드디어 이들의 미국투어가 이루어졌다. 딥 퍼플의 본격적인 미국상륙이 개시된 것이었다. 그와 함께 9월에는 그들의 6집 앨범 'Fireball'이 발표되었고, 이 앨범은 드디어 그들에게 영국 차트 톱을 안겨주었다. 'Fireball'은 'In Rock'의 연장선상적 앨범이나 제작면에서 다소 변화가 엿보였다. 블랙모어의 기타와 로드의 오르간이 훌륭한 컴비네이션 플레이를 전개했으며, 특히 대표곡인 'Fireball'은 마치 쏟아지는 듯한 이언 페이스의 드러밍과 굵직한 사운드, 이언 길런 특유의 빠르면서 다이내믹한 보컬이 귀를 즐겁게 했다. 특히 리치의 노이즈를 잔뜩 먹인 기타톤과 다이내믹하면서 바로크적인 필을 내는 존로드의 하몬드 오르간 솔로는 화끈한 속주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1972년에는 오늘날 록 역사상 가장 훌륭한 앨범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7집 앨범 'Machine Head'가 발표되었다. 헤비 사운드의 극치인 이 앨범은 또다시 영국 차트 톱을 차지했고, 미국 차트에서도 7위까지 올랐다. 이 앨범에는 지금도 전세계적으로 록 클래식으로 추앙받는 'Smoke on The Water' 'Space Truckin' 'Lazy' 'Highway Star'가 담겨있다. 물론 'Maybe I'm Leo''Pictures Of Home' 등도 수작이다.이 앨범으로 딥 퍼플은 오직 레드 제플린에만 견줄 수 있는 기괴하고 거대한 밴드로 음악계에 우뚝 서게 되었다.

특히 이 앨범의 'Smoke on The Water'는 너무나 유명해 두 말이 필요 없을 정도다. 처음의 간결하고 위압적인 금속성 리프는 80년대 헤비메탈의 전설적 표본이 되며, 단순한 기타리프에 박진감을 불어넣는 리듬섹션의 호흡도 기가 막히다. 또한 이 곡에는 유명한 사연이 있다. 1971년 12월 3일 그들은 스위스 몬트로 카지노에서 앨범녹음을 기다리면서 프랭크 자파의 'Mother of Invention' 콘서트를 청중과 함께 지켜보고 있었는데, 어떤 멍청한 인간이 조명탄을 카지노룸에다 쏘아넣으면서 콘서트 도중 카지노가 불타 없어지는 장관이 그들에게 목격되었다. 이 역사적 광경을 담은 곡이 불멸의 명곡 'Smoke on The Water'인 것이다.

그 못지 않게 유명한 'Highway Star'는 시원스러움과 호쾌함, 그리고 스피디함이 거의 카리스마적인 고난도의 속주로 펼쳐지는데, 이언 길런의 고음처리와 존 로드의 오르간도 환상적이지만, 리치 블랙모어의 기타는 거의 괴물의 연주로 들릴 정도이다. 여간 연주하기가 어렵지 않은 이 곡은 아마츄어 기타리스트들의 연주실력을 테스트하는 곡으로도 유명하다. 지금도 리치 블랙모어의 기타는 블루스에 기반한 하드록에 클래식적인 악상을 도입하여, 기타라는 악기에 찾기 쉽지 않은 '우아함'을 지녔으면서도, 동시에 당대에 가장 강력한 테크니션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73년 1월에는 1972년 여름 투어 중 8월 15일에서 17일까지 일본 부도캉에서 가진 공연의 라이브실황이 담긴 더블앨범 'Made In Japan'이 발표되었다. 이 앨범은 미국 차트 6위에까지 올랐다. 레드 제플린의 'The Song Remains The Same', 올맨 브러더스의 'Live At The Filmore'와 함께 '3대 실황 앨범'으로 꼽히는 이 앨범은 실황 앨범임에도 불구하고 사운드의 밸런스가 거의 완벽했다. 리치 블랙모어의 기타는 무서우리만치 웨이브가 격렬했으며, 스튜디오 사운드 보다도 더 정확한 핑거링이 구사되었다. 또 링-모듈레이터를 이용한 존 로드의 해몬드(C-3-Organ) 터치는 전율을 일으킬 정도였고, 'Strange Kind of Woman'에서 보여준 이언 길런의 목소리와 리치 블랙모어 기타간의 대화 - 이언 길런이 반음을 내리면 리치 블랙모어가 곧바로 이를 받는 식의 - 는 라이브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한편 사실상 'Made In Japan'과 동시에 발매된 또 다른 앨범 'Who Do You Think We Are'는 미국 차트 15위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이 앨범은 제작 당시 음악적 견해 차이로 불화가 극심했던 탓인지 이전의 앨범들에 비해 딥 퍼플의 이미지가 가장 약한 졸작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지금까지 거의 볼 수 없었던 슬로-블루스 템포도 있고, 'Super Trouper' 같은 곡에서는 신디사이저와 멜로트론도 등장한다. 대중적인 히트곡은 'Woman From Tokyo'인데, 동양식 트로트 리듬이 들어가 우리에게 특히 흥겹게 들린다.

그러나 그들의 싱글 'Smoke on The Water'가 백만장의 판매고와 함께 미국 차트 4위까지 치고 올라가는 것을 담담히 지켜보며, 보컬 길런과 베이스 글로버는 밴드를 탈퇴해버리고 만다. 세번째의 멤버교체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많은 이들의 우려 속에 블랙모어는 당시 The Fabuloser Brothers에서 활동하던 신예 데이빗 커버데일을 과감하게 발굴하여 보컬로 영입하고, ex-Trepeze에서 베이시스트 글렌 휴즈를 데려와 밴드를 재정비했다.

1974년 3월에는 새로운 라인업으로 만든 앨범 'Burn'을 출시했다. 새로운 라인업으로의 변화는 밴드의 활보에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며, 이 앨범 역시 미국 차트 톱 텐의 자리를 차지했다. 특히 타이틀곡 'Burn'은 공격적인 기타리프와 빠른 드럼, 하몬드오르간 소리도 소리지만, 데이빗 커버데일 특유의 묵직하고 친근한, 블루스에 기반한 목소리가 불을 뿜는듯한 힘으로 밀어붙여졌다. 이렇게 정통 하드록에 블루스적인 매력이 첨가된 것은 신예 보컬 데이빗 커버데일의 공이 컸다. 그의 목소리는 우리나라의 메탈 그룹 '시나위'의 초대 보컬 임재범을 연상시키는데, 전임자인 이언 길런의 목소리보다 훨씬 부드럽고 호소력이 강했다. 요즘은 국내 록커 김경호가 그의 록공연에서 이 'Burn'을 즐겨 부르지만, 데이빗 커버데일과 비교하면 그저 쓴웃음만 나올 뿐이다.

1974년말에는 11집 'Stormbringer'가 발표되었다. 이 앨범 역시 미국 차트 20위권을 마크했다. 록, 클래식, 재즈, 블루스 등을 융합하여 잘 살려낸 크로스오버 앨범 'Stormbringer'에는 데이비드 커버데일의 역작 'Soldier Of Fortune'이 들어있다. 리치 블랙모어의 담백한 연주, 존 로드의 클래식한 오르간 연주도 훌륭하지만, 데이빗 커버데일의 가슴을 적시는 컬컬한 목소리는 더욱 인상적이다(가사도 음미할 만함). 블루스적인 필이 넘실대고, 슬픈 정한이 흐느적대는 이 곡에서 데이빗 커버데일은 더 이상 이언 길런의 대타가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었지만, 이로 인해 밴드에서 일어난 변화는 리치 블랙모어가 감당하기 벅찬 것일 수도 있었다.

타이틀곡 'Stormbringer'도 마찬가지였다. 시원한 사운드와 와우를 적절히 써서 곡의 맛을 낸 것도 종전과는 다른 스타일이지만, 거대한 스케일의 보컬은 이후 데이빗 커버데일의 밴드 '화이트 스네이크'를 연상시키고, 웅장하면서 파워풀한, 그러면서 신비적인 음악세계를 보여주는 기타는 이후 리치 블랙모어의 밴드 '레인보우'를 연상시킨다. 특히 간주에 나오는 페달을 적절히 활용하여 묘한 느낌을 살리는 패턴은 레인보우의 곡에서 자주 발견되는 패턴이다. 결국 이때 딥 퍼플의 팀웍은 조금씩 균열을 보이고 있었으며, 특히 리치 블랙모어는 딥 퍼플을 떠나 자신만의 새로운 음악세계를 펼칠 의도가 분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침내 1975년 4월 11집의 완화함에 반감을 표시한 리치 블랙모어가 딥 퍼플을 떠나 레인보우라는 새로운 밴드를 결성하면서 딥 퍼플은 급격한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물론 블랙모어의 대타로 들어온, 밴드 James Gang 출신의 기타리스트 토미 볼린(미국 태생)은 완벽한 뮤지션이었고, 그의 자작곡 7곡이 수록된 딥 퍼플 최후의 공식 앨범 'Come Taste the Band'는 아름답기 그지 없는 앨범이었지만, 너무 높이 끌어올린 음악성과 종래 딥 퍼플의 하드록적인 성격과 잘 안 어울리는 토미 볼린의 펑크적인 개성때문에 딥 퍼플은 대중과 한결 멀어지게 되었다. 1976년 7월 24일 8년에 걸친 그들의 활동은 멈춰졌으며, 그로부터 4개월 후인 12월 4일 비운의 기타리스트 토미 볼린의 꽃다운 젊음도 꺾어지고 말았다.

이것으로 딥 퍼플은 사실상 끝났는가 싶기도 했지만, 8년 후 이들은 반짝 재기하기도 했다. 1983년 레인보우의 해체 이후, 1984년에 존 로드, 이언 길런, 리치 블랙모어 등 제 2기 때의 멤버들이 다시 모여 새 앨범 'Perfect Strangers'를 내놓은 것이다. 이 앨범은 오랫동안 그들을 기다린 팬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을 받으며 앨범차트 17위까지 마크되며 플래티넘을 다시 한 번 따내게 되지만, 사실 팬들은 음악적인 의미보다는 딥 퍼플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 뒤 1987년 그들이 오랜 심혈을 기울여 만든 'The House of Blue Light'은 그다지 큰 반응을 얻지 못했고, 역시 그 뒤에 내놓은 편집 라이브 앨범 'Nobody's Perfect'도 별로 큰 호응을 받지 못했다.

이렇듯 아직도 뭔가 활동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딥 퍼플이지만, 리치 블랙모어의 탈퇴 이후로 딥 퍼플은 더 이상 딥 퍼플이 아니었고, 예전의 모습 역시 보여주고 있지 못했다 할 것이다. 그들은 70년대 최고의 연주자들이 모여 만든 라이브 록밴드였지만, 비틀즈와 같은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도 아니었고, 레드 제플린과 같은 끈끈한 팀웍과 작품상 압축미를 보인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보다 격렬하고 남성적인 무대 매너와 클래시컬하고 고급스러운 멋을 연출했던 그들은 자화자찬하는 노랫말 이상으로 이후의 록 뮤지션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볼 수 있다.

1. No Sugar Tonight (with New Mother Nature) - The Guess Who
2. Fools - Deep Purple
3. Changes - Black Sabbath
4. Behind Blue Eyes - The W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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