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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W-pop

John Lennon

by lisa311 2012. 11. 22.




 



밥 딜런, 지미 페이지, 로저 워터스와 함께 내가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해외 대중가요 가수들 중 한 사람인 존 레논은 마치 전설처럼 많은 것이 신비와 혼돈의 안개에 뒤덮여 있다. 평범한 모범생처럼 보이는 용모, 수줍은 듯 보이는 두 눈은, 동시대의 폴 매카트니나 믹 재거의 비범해 보이고 광기어린 천재 같아 보이는 얼굴에 비해 너무나 밋밋하기만 하고,

그런 반면에 비틀즈의 초기 앨범 때부터 보여준 폭발적인 가창력과 탁월한 리듬감각에 기반한 작곡능력은 그가 천생 음악가임을 말해준다. 또한, 'In His Own Life'라는 에세이로 베스트 셀러 톱을 기록했을 정도의 뛰어난 문장력은 그의 막강한 지적 능력을 말해주는 것 같기도 하며, 그의 인생 후반부에서 그가 보여줬던 남다른 사회참여의식은 그가 얼마나 정치적인 인물이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과연 누구인가? 뛰어난 가수인가, 지적인 시인인가, 아니면 '노래 운동가'이거나 혁명가인가?

물론 그는 아직도 국내의 많은 사람들에게 단순히 '사랑과 평화'만을 외친 가수, 부르죠아적 휴머니즘만을 주창한 가수로만 인식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한국에서 그의 대표곡들로 알려져 있는 'Imagine', 'Love', 'Woman', 'Oh, My Love' 등의 곡들이 그다지 분명한 정치의식을 드러내지 않는 것처럼 보일 뿐 아니라, 그의 실체 자체가 국내에 충분히 소개되어 있지 않은 데서 말미암은 현상인 것 같다. 하지만 중학생 시절 그의 음반인 'Plastic ono  Band'를 갖고 있던 친구 집에 우연히 가서 'Working Class Hero'라는 곡을 들었던 나는 그가 얼마나 규격화되고 상업화된 소비사회에 비판적이었으며, 권위주의와 보수주의에 대해 저항하고, 노동운동에 대해서도 얼마나 깊은 이해심을 갖고 있던 인물이었나 하는 사실에 대해 무척 놀랐던 기억을 지울 수 없다.

"그들은 가정에서 당신에게 상처를 주고 학교에서는 당신을 매질한다. 당신이 똑똑하면 증오하고 바보일 땐 무시한다. 그래서 당신은 돌아버려 그들의 규율을 따르지 않게 되는 것이다. 노동계급의 영웅이란 될 만한 것이다. ...... 그들은 당신을 종교와 섹스와 TV로 중독시킨다. 그런데 당신은 자신이 현명하고 계급이 없으며 자유롭다고 여긴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당신은 여전히 형편 없는 농부나 다름 없는 것이다. 노동계급의 영웅이란 될 만한 것이다!" - Working Class Hero -

'Imagine'이란 노래도 마찬가지로서, 많은 사람들은 그 노래가 그저 순수예술가적인 입장에서 종교도 국가도 소유도... 그 밖에 그 어떤 것도 다 부정하려 하는 회의주의적이기만 한 노래를 부른 것으로 알고 있지만, 'Imagine'과 같은 앨범에 들어 있는 'Power To The People'(민중에게 권력을)이라는 노래를 들어보면, 여기서 존 레논이 무엇을 imagine했던 것인지 우리 모두는 섬뜩할 정도로 분명히 알게 된다.

"민중에게 권력을! 즉각 민중에게 권력을! 우린 혁명을 바란다. 똑바로 두 발을 세워 거리로 나서야 한다. ...... 당신이 부리는 사람들이 아무런 대가도 못 받고 노동하고 있다. 그러니 그들이 사실상 가지고 있는 것을 그들이 소유하도록 해달라. 우리가 전면에 나서 당신들을 끌어내릴 것이다."

이렇듯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그룹 비틀즈의 리더이자 대표적 정치가수였던 존 레논은 1940년 10월 9일 오후 6시 영국의 리버풀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2차 세계대전 중이었고 리버풀은 영국의 주요 항구도시였기 때문에, 독일 나찌군의 집중 공습대상이었다. 때문에 그는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환경에서 성장해야 했고, 의식주조차도 제대로 해결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의 아버지 프레디 레논은 아일랜드계에다 뱃사람이고 한량이었다. 존이 태어났을 때도 아버지는 바다에 나가 있었고, 태어난 후에도 존이 아버지의 얼굴을 본 일은 별로 없었다. 또 존의 어머니 줄리아는 극장 안내원 출신에 소위 "노는 여자"였다. 밤마다 뱃놈들과 함께 술 마시고 춤 추며 노는 게 일이었으며, 존이 다섯살 때와 여섯살 때에는 호텔 웨이터 등과 눈이 맞아 외간남자의 아이를 낳기도 했다.

어느날 모처럼 휴일을 얻은 아버지와 함께 블랙풀이라는 휴양지로 여행을 떠나게 된 어린 존은 그날 일생일대의 아픔을 맛보게 된다. 아버지가 존에게 아빠와 엄마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한 것이었다. 존은 아빠와 함께 하겠다고 울먹거렸지만, 곧 돌아가는 엄마의 치맛자락을 잡고 가지 말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존은 어머니에게서도 버림을 받았다. 이런 이유로 존은 대부분의 유년시절을 미미라는 이름의 이모 집에서 보내야 했다.

그 후 존은 학교에서 소문난 문제아로 자라났다. 수업을 방해하고, 학생들에게 싸움을 걸길 즐겼다. 학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존과 사귀지 말라고 했으며, 선생들은 정기적으로 존을 두들겨팼다. 하지만 수수께끼 같은 것은 그런 악동짓을 하고 다니면서도 존은 대단한 문학소년이었다는 것이었다. 또 그는 16살 때 빌 할리의 등장을 계기로 록큰롤에 관심을 가져, 리틀 리챠드, 엘비스 프레슬리 등의 록큰롤에 종교 이상의 열정을 바치게 되었다.

이때부터 존은 어머니와 다시 가까와지기 시작한다. 보스기질이 강했던 존이 무슨 세력규합이라도 하듯 '쿼리맨'이란 폭력써클성 그룹을 만들어 음악활동을 하자, 이모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방해했지만, 밴죠를 연주할 줄 알았던 존의 어머니는 존에게 코드를 가르쳐주는 등 약간의 지원을 해준 것이었다. 이때 존은 자기보다 두 살 어리지만 음악에 대단한 재능을 가진 폴 메카트니를 그의 그룹에 가입시키고,

기타를 꽤나 잘 쳤던 조지 해리슨도 자기 패거리에 끼워서 그들의 영향을 받아 음악적으로 크게 발전하게 된다. 여기서 주목할 일은 조지 해리슨이 존을 우상처럼 따라다녀 심지어는 존이 여자친구랑 데이트를 할 때도 꼽사리를 꼈다는 사실이다. 어려서부터 존이 무척 특이한 카리스마를 가졌던 인물임을 알게 하는 일이다.

하지만 존의 어머니는 곧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이런 슬픔 속에 존은 술집을 전전하며 손님들을 위협해 돈을 뜯는, 폐인생활에 빠져들기도 한다. 사실 그는 학창시절 같잖은 터프가이 흉내를 내며 주위에 항상 강한 모습만을 보여주려 했던 전형적인 깡패소년이었다. 그러나 그런 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그림공부와 책읽기에 몰두했고, 폴과의 공동작업을 통해 무수히 많은 아름다운 곡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어쨌거나 그의 그룹 쿼리맨은 여전히 인정받지 못했고, 그는 생계유지조차도 힘겨움을 느껴야 했다. 그는 결국 스트립쇼 백밴드나 하는 어려운 생활을 청산하기 위해 폴, 조지 등과 함께 바다 건너 함부르크로 가서는 하루 8시간 동안 피땀 나는 연주를 하며, 실력을 갈고 닦았다. 함부르크에서 그는 독일의 부두 노동자들에게 '이 나찌 놈들아, 탱크는 어디다 숨겨 놓았느냐'고 외치며 무대 위를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는 등 아주 막가는 모습을 보였지만, 독일의 청중들은 이러한 그의 모습을 더욱 좋아했다고 한다.

이러한 혹독한 수련기간을 거치면서, 그는 미국 흑인들의 록커빌리에 의해 변형된 포크와 블루스를 체화하고, 특유의 정력적이며 강력한 리듬 스타일을 확립한다. 이때 익힌 그의 코드감각은 다양한 장르에 기반한 것인 만큼 독특하고 새로운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수련기간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의 앞에는 한동안 믿어지지 않는 성공만이 있을 뿐이었다.

사실 겨우 20대 초반의 나이에 그의 그룹 비틀즈가 갑자기 세계를 석권해버리던 그 순간에도, 존 레논은 단순히 '음악하는 양아치'답지 않게 뭔가 특이한 이미지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던 인간이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잘 생기고 노래 잘하는 연예인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지적이고 시니컬한 느낌을 주었고, 비틀즈 초기 시절에 처음으로 미국에 상륙해서 자기를 보려고 모여든 소녀팬들을 보고는 놀라서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잠시 얼굴을 내밀었다가 얼른 숨어버린 일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는 유난히도 수줍음을 많이 탔으며, 자기 유명세에 대해 부담을 느끼는 듯한 모습이었다.

어쨌든 그의 그룹 비틀즈는 1960년대 중반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의 그룹이었고, 그가 내놓는 모든 곡은 무조건 넘버원 히트곡이었다. 이렇듯 그가 거둔 음악적 성공만으로도 그는 여느 위대한 가수들에 비해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 이상의 위대한 점이 있었다. 그는 끊임없이 자기 정체성에 대해 질문하고 고민하고 번뇌했으며, 그러한 자신의 문제의식들을 음악 뿐 아니라 다른 정치적 행동을 통해서도 끊임없이 표출하려 노력했던 것이다.

사실 존 레논은 지독히도 반항적인 성격을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비틀즈 초창기 시절, 당시의 보수적인 시대상황을 감안한 매니저의 전략적인 결정에 따라, 바가지머리와 귀여운 정장으로 대중 앞에 얌전히 등장해야 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음악에 열광하는 대중들의 모습에서 하나의 문화코드를 읽어내고, 점점 파격적인 개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는 아직도 노인 위주로 돌아가고 있던 당시 유럽과 미국의 권위주의적 사회분위기에 맞서, 젊은 청년들의 순수하고 풋풋한 문화를 새로운 사회문화의 대안으로 제시하려 하였다.

시대는 바야흐로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소품종 대량생산, 소품종 대량소비의 군사문화시대가 점차 막을 내려가던 시점이었다. 획일적이고 강압적인 사회통합의 필요성 대신 유연하고 다채로운, 새로운 진보이념의 필요성이 제기되던 시절이었다. 진보좌파 진영에서도 여태껏 경제적 분배문제에 지나치게 치중하던 공산주의운동은 막을 내리고, 새로운 정치적 전략으로서 문화운동의 필요성이 대두되던 시점이었다. 이 시점에서 비틀즈는 '착하고 예절 바른 아들 딸' '고분고분 말 잘 듣고 사회질서에 순응하는 인간'의 미덕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회분위기로부터 벗어나, 젊은이답게 길들여지지 않은 순수함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옳지 못한 권위에는 저항할 줄도 아는, 반항적 젊은이상을 제시하려 하였다.

존 레논은 물론 사회적, 경제적으로 이미 부와 명성을 쌓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성공한 노동자계급 출신과는 달리 성공 이후로도 그의 '올챙이 시절'을 잊지 않았으며, 자신이 굶주리고 억압받던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사회적 문제의식까지도 여과없이 표출하려 하였다. 그는 종교적이고 윤리적이고 위선적인 모든 것들에 대해 저항했고, 차별과 소외와 폭력과 전쟁에 대해 비판하려 하였다. 기존의 권위에 대해 극도의 거부감을 갖고 있던 그의 생각은 이브닝 스탠더드지와의 인터뷰에서 문제의 기독교 발언으로 표출되었다.

"기독교는 결국 사라질 것입니다. 쇠퇴해 소멸하고 말 테니까요. ... 내 말이 옳음이 언젠가는 증명될 것입니다. 비틀즈는 예수 그리스도보다 유명하죠. 록큰롤과 기독교 중, 어느 쪽이 먼저 사라질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현명했지만 제자들은 우둔했습니다. 그들 때문에 기독교가 소멸되어간다면, 우리쪽이 더 유리하지 않을까요?”

물론 기독교도들은 발끈했다. 곳곳에서 존 레논의 비틀즈를 규탄하는 집회가 열렸고, 비틀즈의 음반을 태우는 의식이 거행되었다. 이에 대해 그가 종교와 마찬 가지로 음악도 대중과 함께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을 뿐이라고 해명을 하고 나서도 소동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반공이념과 종교적 편견으로 똘똘 뭉쳐진 서구사회의 보수주의세력에 대해 그가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밀었다는 사실을 누구나 그의 발언에서 알아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아가 그는 1966년 6월에 미국 정부가 베트남전쟁 참여 의사를 밝힌 데 대해 즉각 반대의사를 나타냈다. 당시 그와 비틀즈는 전세계적으로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으므로, 그 발언 역시도 큰 파장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이때 그의 발언은 다음과 같았다.

"나라를 통치하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계속 권좌에 머무르는 것과 실제 일을 민중들에게 알려주지 않는 것입니다. ... 물론 정치가들이 모두 흉악한 사람은 아니죠. 내가 싫어하는 것은 정부의 시스템입니다."

이 발언도 지금의 기준에서 보면 너무나도 당연하고 올바른 말이 아닐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 당시 보수주의 세력들은 존 레논에 대해 여과없이 분노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이러한 여러 움직임들에 대해 존 레논은 아주 작심을 하고서 사사건건 보수세력들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흑인인권문제, 제3세계 인권문제, 동성애 합법화문제, 군수자본과 전쟁문제, 공해자본과 환경문제 등 수많은 진보적 문제에 대해 정치적 발언을 해대기 시작했다. 같은 진보진영 내에서도 '너무 튀는 거 아니냐' '너무 앞서가는 거 아니냐'라는 등의 견제성 멘트들이 나올 정도였다.

이때쯤 존은 오노 요꼬라는 일본여자를 만나게 된다. 당시 그녀는 두 번이나 결혼했던 이혼녀였다. 반전문제와 유색인종 인권문제 등 수많은 정치적 문제에 있어서 정확히 의견을 같이했던 요꼬에 대해 동지적 유대의식 뿐만 아니라 깊은 사랑의 감정을 느끼면서도, 유부남이라는 처지와 파탄 직전에 이른 가정, 그리고 기독교 보수세력과의 갈등에 괴로워진 그는 마약에 빠져들기도 한다(물론 당시 LSD는 합법적이었고, 그 부작용이 크게 알려지지도 않았던 때였다). 이후 그는 세상 만사를 다 떨치고 인도의 종교가인 마하리쉬 마헤쉬 요기에게 몰두해 1968년 2월, 히말라야에 있는 마하리쉬의 명상 캠프에 들어가기도 한다. 여기서 8개월 정도의 시간을 보냈던 존은 이후의 곡에 카르마, 만트라, 구루 등의 산스크리트어를 이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오노 요꼬와 결국 결혼하게 되면서 그는 다시 행동하는 모습으로 바뀌어가기 시작한다. '동성연애자'라 놀린 디스크 자키에게 주먹을 휘두르던 모습은 더이상 인도 명상철학에 심취하던 온화한 시절의 모습이 아니라 청소년시절의 터프가이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그전까지 비록 반항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어도 방송출연시만큼은 말쑥한 차림에 예절바른 태도를 지키던 그가, 토크쇼에 나와 다리 꼬고 앉아 담배를 연신 피워대는 식의 산만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하지만 이때부터 서구사회의 젊은이들은 정말로 존 레논처럼 어른들 앞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담배를 피워대기 시작했다. 사회분위기는 정말 존 레논의 뜻대로 점점 바뀌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의 정치적 행동은 본격적인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1969년 말에는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받은 MBE 훈장을 반납했고, 1970년엔 살인죄 누명으로 사형당한 제임스 헨러티를 위해 '영국 정부가 헨러티를 죽였다'라고 쓰인 가방을 들고 행진했다. 강도죄 혐의로 사형당한 흑인 인권 지도자의 게토 설립을 돕기 위해 요꼬와 함께 머리카락을 잘라 경매에 붙이기도 했다. 이에 대한 언론의 반응은 썰렁했고 <데일리 미러>지는 존을 '올해의 광대'라고까지 평했지만, 그는 이제 단순한 대중가수가 아니라 그 이상의 존재, 시대의 아이콘이 되어가고 있었다.

한편 1969년에 존은 에릭 클랩튼 등과 함께 '플라스틱 오노 밴드'를 만들어 토론토 페스티벌에 참여한다. 이후 폴의 독선적인 성향과 도전적인 성격의 요꼬 등으로 인해 1970년 초 비틀즈는 해산되었고, 이를 계기로 그는 정치활동에 더욱 불을 붙여, 당시 신좌익(New Left)의 입장에서 무장폭력투쟁의 기치를 드높이고 있던 타리크 알리, 로빈 블랙번, 제리 루빈 등과 어울리기까지 한다.

이러한 배경에 대해서는 당시 시대상황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60년대말부터 불길처럼 퍼져나간 공민권투쟁, 반전운동은 '68년말 마르틴 루터 킹 목사 암살사건과 월남전의 격화를 계기로 과격한 양상으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대학가의 징병거부시위는 무장투쟁의 단계로까지 진입했고, 평화를 주창한 비폭력노선의 히피들 간에도 과격집단, 이른바 '이피'가 등장했다. 이피들은 흑인무장투쟁 그룹인 '블랙 팬더'와 제휴, 폭력혁명의 기치를 드높였는데, 이 이피들의 리더적 존재가 제리 루빈과 애비 호프만이었다.

존 레논은 이들과 교유하고 많은 사안에 있어서 연대했으며, '69년 5월 캐나다 몬트리얼에서의 '베드인' 행사, 9월 터론토에서의 '라이브 피스' 공연, '70년 11월 뉴욕 아폴로극장에서의 '애티카 자선 콘서트', 12월 미시건주 앤아버에서의 '존 싱클레어 자선 콘서트' 등에 잇따라 출연하여 평화를 외치고 사회의 억압 및 모순을 규탄했다. 이윽고 그가 발표한 'Imagine'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지만, 뉴레프트들에게는 찬송가처럼 여겨졌다.

당시 민주당 조지 맥거번 후보와 치열한 선거전을 벌이고 있던 닉슨 정권은 처음으로 18세 청소년에게 투표권이 부여된 1972년의 대선에서 레논이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 판단했다. FBI 요원은 존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했고, '72년 2월로 기한이 끝나게 된 그의 미국 체류 비자 연장 신청은 기각되었다. 이후 미국 영주권을 획득하려는 존과 미국 정부 당국과의, 길고도 치열한 법정투쟁이 전개되었다.

이어 그는 '72년 6월, 2장 짜리 앨범 'Sometimes in New York City'를 출반하는데, 이 앨범은 그때까지 나온 대중가요 음반을 통틀어서 가장 급진적이라 할 만했다. 여기서 존은 '71년 뉴욕시 애티카 형무소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주방위군이 발포해 43명의 사망자를 낸 반민주적 사태를 성토했고, 영국정부에도 핏발을 세워 당시 격화일로를 겪고 있던 북아일랜드 식민정책에 대해 규탄의 목소리를 높였다. 앨범매상의 이익금은 IRA에게 기부되었으며, 특히 'Sunday, Bloody Sunday'는 이후 U2에게 영감을 제공하기도 했다. 이 앨범에 담긴 노래들의 가사를 살펴보자.

"우린 여성더러 가정만이 그녀가 있어야 할 곳이라고 말한다. 그리곤 그녀가 친구가 되기엔 너무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한다. 그녀가 하인이 아니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여성은 노예 중의 노예이다!" - Woman is the Nigger of the World -

"안젤라, 그들이 당신을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당신의 배우자도 총살했습니다. 정말, 당신은 세계의 무수한 정치적 죄수 중 한 사람입니다. ...... 안젤라, 세계가 바뀌는 소리가 들리십니까? 세상은 당신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곧 세계의 누이 형제들에게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아직도 민중의 교사입니다!" - Angela -

"죄수를 쏘다니. 43명의 가련한 여인들을. 언론은 죄수에게 책임을 돌리지만 죄수들은 서로 죽이지 않았다. 록펠러가 방아쇠를 당겼지! 그게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것이다. 모든 죄수를 석방하라!" - Attica State -

"앵글로 색슨 돼지들과 스코틀랜드인들이 북부(아일랜드) 식민지화를 위해 보내졌다. 피에 젖은 유니온잭을 흔들면서. 그게 무슨 가치가 있는가. 어찌 너희들이 자랑스럽고 자유로운 사람들을 감히 억류한단 말인가. 아일랜드는 아일랜드에게 맡기고 영국군은 바다로 돌아가라!" - Sunday, Bloody Sunday -

이렇게 그가 열심히 뛰어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닉슨은 60.7%라는, 공화당 후보 사상 최대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다. 큰 실패감을 느낀 그는 뉴레프트들과 소원해졌다. 요꼬와도 별거하고, 메이 팡이라는 젊은 중국계 여자와 같이 살았다. 이후 'Mind Games'나 'Walls and Bridges' 같은 앨범에서 그는 완전히 비정치적으로 변절한 모습을 보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라이벌인 폴 메카트니에 비해, 심지어는 링고스타에 비해서도 그의 앨범의 인기는 현저하게 뒤졌다. (물론 그 당시엔 아무리 그랬다 해도 지금까지 음악적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노래들은 존 레논의 곡이 압도적으로 더 많다. 비틀즈 해체 이후 만들어진 폴 메카트니의 곡들 중에 지금까지 사람들의 뇌리 속에 남아 있는 노래들은 거의 없는 반면, 존 레논의 노래들은 지금도 라디오만 켜면 수시로 나온다. "Imagine" "Love" "Woman" "Oh, My Love" 등등...)

이후 의기소침해진 그를 요꼬가 또다시 붙잡았다. 그는 이제 자신의 일상생활 속에서 남녀간 성적 차별을 실천적으로 철폐하겠다는 결심 하에 전업주부로 변모하여 가정살림을 도맡는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그가 온갖 자질구레한 육체노동을 마다하지 않으며 집안에서 주부노릇을 하는 동안, 요꼬는 돈을 투자해 재산을 점점 불려나갔고, 이 재산으로 진보좌파단체에 수많은 자금을 공급했다. 물론 가정생활에 충실하는 것으로 인해 그의 정치적 참여는 많이 줄어들었지만, 당시의 미국에는 카터의 민주당정부가 들어서 있어, 그가 굳이 대립각을 세워야 할 만큼 분명한 정치적 타겟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은둔만 하고 있을 그가 아니었다. 다시 서구사회에 우익 보수주의의 바람이 불어닥치는 속에서, B52의 '록 롭스터'를 듣고 재기를 결심한 그는 새로운 앨범 'Double Fantasy'을 만든다고 발표하고, 근 7년 만에 파업 노동자들을 위한 집회 참여를 계획했다. 하지만 1980년 12월 8일 인터뷰를 마친 뒤 행복해 보이는 얼굴로 집에 돌아가던 그의 집 앞에는 마크 채프먼이라는 암살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더욱 성숙해진 모습으로, 보다 활기찬 사회활동을 펼치려 했다가, 결국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가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가 총을 맞고 처참하게 죽은 날, 요꼬가 다코다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200여명의 팬들이 운집해 있었고, 1시간도 못돼 그 수는 600여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모두 울면서 노래하고 있었다. 그들은 철야로 존의 마지막 날을 기렸다. 다음날엔 팬들의 자살이라는 슬픈 소식이 이어졌다. 이후 센트럴파크에 모인 10만 추도인파(존 에프 케네디를 능가할 것이다)는 10분간 묵념을 하였다. 거대한 인파 위엔 정적만이 감돌았고 방송 보도진도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그의 사망과 함께, 미국은 레이건의 보수 시대가 활짝 열렸다.


어쨌거나 존의 사망으로 최고의 그룹 비틀즈가 다시 모여 한 장만 더 앨범을 만들어 달라는 전 세계 팬들의 성화는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단순히 한 음악가의 죽음,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존 레논은 기본적으로 평생을 자신의 신념대로 살았던 인물이었다. 그는 20대 중반 이후 사회주의 좌파들과 정치적 신념을 같이 했지만, 좌파들 가운데서도 다소 폭력적이고 과격한 부류들과는 명백히 선을 그었고, 그들이 폭력적인 행동을 할 때나 소비에트 관료제적 이상사회를 건설하려 할 때는 가차없는 비판을 퍼붓기도 했다.

사실 그가 평생을 집중했던 과제는 무엇보다도 반전평화와 반엄숙주의, 반민족주의였다. 그밖에도 음악가와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창의력을 자유롭게 발현할 수 있는, 관용이 살아있는 사회, 열린 사회의 건설 등이 그가 최우선적으로 꾸었던 꿈들이었다.

오늘날 좌파 진보진영 뿐만 아니라, 중도 자유주의 진영에서도 존 레논이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그가 이처럼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평화주의자, 자유주의자에 더 가까웠기 때문일 것이다. 존이 사망했을 때 그의 영원한 라이벌이자 친구인 폴 매카트니가 추모사로 언급했던 것처럼, 존 레논은 20세기 예술, 음악 그리고 세계평화에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지대한 공헌으로 영원히 기억될 위대한 인물이었음에 틀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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