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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Culture/history

1979년 10월, 마산에선 무슨 일이? 부마민주항쟁 생생 복원

by lisa311 2019. 10. 18.


올해 처음 국가기념일로 지정돼 정부 주관으로 열린 부마민주항쟁 기념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의 표정은 시종일관 어두웠다.

유신독재 폭력에 맞서 부산과 마산 일대에서 들끓었던 1979년, 2차 사법시험 준비로 눈과 귀를 닫고 세상과 단절한 채 학업에 열중했던 자신의 모습에 대한 부채 의식이 고스란히 묻어나오는 듯했다.

청년 문재인으로 느꼈을 시대적 아픔을 대통령으로서 국민 앞에 사과하며 국가 폭력의 부당함을 강조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풀이 가능하다. 

문 대통령은 역사책에서만 회자되던 부마민중항쟁의 정신을 국가기념일로 지정, 모든 국민이 함께 그 정신을 기릴 수 있도록 했다. 4·19혁명과 5·18광주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과 함께 오랜 숙원이었던 10월 부마민주항쟁까지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데 대한 기쁨은 잠시 뿐이었다.  

16일 마산 민주항쟁의 발원지인 경남대학교에서 열린 부마항쟁기념식에 찾아 정부를 대표해 피해자들에게 허리를 숙였다.

문 대통령은 "유신독재의 가혹한 폭력으로 인권을 유린당한 피해자들 모두에게 대통령으로서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기념식이 진행되는 중에도 문 대통령 얼굴에 그늘이 떠나가지 않았다.

경남대학교 재학생들과 배우들이 항쟁 모습을 재현하자 문 대통령은 입을 꾹 다문채 공연에 집중했다.

마치 40년 동안 쌓아온 마음의 빚이 고스란히 얼굴에 투영되는 듯 했다.

부마항쟁이 발발한 1979년 10월, 문 대통령은 같은 해 1차 사법시험을 통과한 후 2차 합격 준비에만 매진했다.

군 탱크가 시위대를 깔아뭉갰다는 등 소문이 흉흉했지만, 문 대통령은 세상과 단절한 채 고시 공부에만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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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뉴시스】배훈식 기자 =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16일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경남대학교에서 열린 제40주년 부마민주항쟁 기념식에 참석,

내빈들과 함께 민주열사에 대한 묵념을 하고 있다. 유신 독재 체제에 저항해 부산과 마산(현 창원시) 일대에서 시작한 민주화 운동인 ‘부마민주항쟁’은 올해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2019.10.16. dahora83@newsis.com

유신독재 폭력에 맞서 싸웠던 시민들과 함께 하지 못한 데 대한 부채의식이었을까. 공연 단원들이 "유신철폐, 독재타도"라고 외치자 문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옆에 앉아있던 부인 김정숙 여사는 눈을 질끈 감은 후 긴 숨을 내쉬며 집중했다.

문 대통령은 당선 전에는 부마민주항쟁 기념사업회에서 활동하고 지역에서 열린 기념식에도 참석해 자리를 지킨 것으로 전해졌다.  

부마항쟁과의 아찔한 인연 역시 문 대통령 마음의 무게를 가중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복무했던 제1공수여단 제3대대가 실제 부산 항쟁 진압군으로 투입되면서 자칫하면 국민에게 총을 겨누는 역할에 동원됐을지도 모른다는 아찔함은 그의 저서에도 잘 녹여져 있다. 

문 대통령은 '대한민국이 묻는다. 완전히 새로운 나라, 문재인이 답하다'

 저서에서 "제대하고 난 뒤 부마항쟁 때 제가 있던 부대가 부산에 투입됐다"며 "거기에 제 후임병,

조수였던 친구가 진압부대로 왔다. 제가 조금 늦게 군대생활 했다면 또 어떤 운명 됐을지 아찔하다"고 돌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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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뉴시스】배훈식 기자 =


문재인 대통령의 부인인 김정숙 여사가 16일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경남대학교에서 열린 제40주년 부마민주항쟁 기념식에 참석, 피해자 증언 영상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오른쪽은 옥정애 마산시위참여자.


유신 독재 체제에 저항해 부산과 마산(현 창원시) 일대에서 시작한 민주화 운동인 ‘부마민주항쟁’은 올해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2019.10.16. dahora83@newsis.com


문 대통령은 1978년 2월 31개월 간의 복무를 마치고 제대했고,

당시엔 다행히 진압에 출동한 적이 없었다고 그의 저서에서 회고했다.  

이날 문 대통령과 김 여사의 옆자리에는 부마민주항쟁에 참여했다가 시위 주동자라는 이유로 모진 고문을 당했던 옥정애씨가 앉았다. 옥씨는 피해자들의 증언이 담긴 영상들이 이어지자 눈물을 쏟아냈다.  

김 여사는 옥 씨를 다독이며 함께 눈물을 흘렸고, 문 대통령도 기념사를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와 옥씨를 위로했다.

피해자들이 겪었던 고통은 동시대를 살았던 문 대통령과 김 여사에게도 지울 수 없는 기억이었다. 

한편 문 대통령은 식에 앞서 부마민주항쟁 특별전시를 관람했다.

이명곤 부마민주항쟁 기념재단 상임이사의 항쟁 당시 설명을 들은 문 대통령은 "부산에 이어 마산에서도 (항쟁 의미를) 확산시켜야 된다는 심정이었을 것 같다"며 "부산, 창원, 경남이 통합해서 기념식을 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논의가 이전부터 있었는데,

이번에 통합해서 (기념식을 하는)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고 한정우 부대변인은 서면브리핑을 내고 전했다. 

rediu@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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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방송되던 <MBC 스페셜>이 목요일로 시간대를 옮겼다.

그리고 첫 방송을 '부마민주항쟁'을 2부작으로 준비했다.

드라마와 다큐를 적절하게 배합한 방식도 색다르지는 않지만 잘 적용되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 가장 중요한 기폭제였던 '부마민주항쟁' 40주년 기념이라는 점도 의미가 있었다.

1979년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항쟁은 그렇게 박정희 유신체제 붕괴로 이어졌다.

억눌렸던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하며 박정희 정권의 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가 대통령 저격으로 '유신체제'는

완벽하게 종말을 고했다. 하지만 전두환이 광주 시민들을 학살하며 독재는 지속되었다.


드라마 방식을 도입한 다큐는 실존 인물들의 인터뷰를 통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아이들이 '유신찬가'를 부르던 시절, 오직 박정희를 신격화하고 찬양해야만 했던 그 시절의 통제는 상상을 초월할 수준이었다.

 


MBC 스페셜 ‘부마항쟁 40주년 특집 1979 1부 - 나는 저항한다’ 편


대통령에 대한 발언만 해도 잡혀가던 시절이 바로 70년대다. 장발도 안 되고 짧은 치마를 입어서도 안 된다.

불온서적과 음악은 통제되었다. 그 기준은 오직 박정희를 찬양하느냐 아니냐다.

절대적인 존재인 박정희를 찬양하지 않는 모든 이들은 간첩일 뿐이었다. 신기하게도 이런 논리는 현재에도 존재한다.


지난 촛불 정국을 지나며 빨갱이 몰이가 급격하게 맥을 못 추는 상황이 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북풍을 노리는 자들이 넘쳐난다. 

박정희 최측근인 박종규가 지배하던 경남대. 그곳에서 유신체제에 반대하던 학생들의 이야기는 처참했다.

더는 참지 못하고 들고일어났던 학생들은 잔인하게 억압당했다.

여학생들은 치마를 뒤집어 얼굴을 가린 채 끌려가 다리가 피투성이가 될 정도였다.


고문을 자행하는 경찰들에게는 어린아이도 의미가 없었다.

그저 데모를 했을 것이라는 이유로 고교생들까지 잡아가 무자비한 폭행을 하는 당시 경찰은 일본 순사 그 자체였다.

억압만이 유일한 통제수단이었던 박정희 정권. 잘못된 정책으로 경제가 무너지고,

직격탄을 맞은 부산지역은 불만이 폭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4.19 이후 가장 많은, 3천 명이 넘는 이들이 거리로 나섰다. 1

979년 10월 16일 부산대 시위를 시작으로 부마민주항쟁은 시작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17일 청와대에서는 박정희와 정치인들은 유신 선포 기념식을 즐기고 있었다.

전날 학생들이 거리에 나서고, 그런 학생들을 억압하는 상황에서 청와대는 웃고 있었다.



MBC 스페셜 ‘부마항쟁 40주년 특집 1979 1부 - 나는 저항한다’ 편


박정희의 최측근 차지철은 2백~3백만 정도를 죽여도 상관없다며 강력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했다.

특전사 공수여단이 18일 부산으로 급파되었다. 김재규와 전두환이 현장으로 향했다.

중정 김재규는 현장을 보고 박정희의 유신 체제는 끝났다고 확신했다. 전두환은 그와 반대였지만 말이다.


유치준 사망 은폐와 故김주열 열사 사건 등 정권은 그렇게 사건을 은폐하고 조작하기에만 급급했다.


부산대 시위 10일 후인 10월 26일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에 무너졌다. 그렇게 유신체제는 종말을 기했다.

김재규의 이 선택은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바꿨다.


전두환 신군부의 등장으로 인해 늦춰지기는 했지만, 그렇게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국민들에게 각인되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거쳐 87년 6월 항쟁, 그리고 촛불 혁명으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쟁취 역사는 계속 이어졌다. 


<MBC 스페셜>은 색다른 접근법으로 중요한 역사의 순간을 담았다.

처음으로 국가 기념일로 지정된 '부마민주항쟁'을 위한 특집이라는 점에서도 특별하게 다가왔다.

가장 늦게 국가 기념일로 지정된 '부마민주항쟁'은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시발점이다.

그런 점에서 <MBC 스페셜>의 선택은 반갑다. 민주주의가 근본적으로 위협받고 있는 현실에서 절실함으로 다가오니 말이다.

 

장영 기자  mfmc86@hanmail.net


부마민주항쟁 당시 출소하는 시위 관련자들의 모습. (사)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부마항쟁은 1979년 10월 16일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반대하며 부산 및 마산 지역에서 일어난 시위다. 올해 40년 만에 ‘국가기념일’로 지정돼 재평가를 받고 있다.

부산대에서 처음 터져 나온 ‘유신 반대, 독재 타도’ 열망은 이틀 뒤인 10월 18일 마산까지 번졌다.

부마항쟁은 ‘10·26 사태’로 이어져 박정희 군사정권을 종료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6·10 민주항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전두환 신군부가 들어선 후 관련 자료가 많이 사라져 다른 민주항쟁에 비해 다소 늦게 국가기념일 지정을 받았다.

현재까지 부마항쟁 사망자는 고(故) 유치준(당시 51)씨 한 명이며 국가가 인정한 관련자도 200여명 정도다.

오는 12월 부마민주항쟁 진실위원회의 조사 기간이 끝나기 때문에 진상규명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1979년 10월 18일 부마민주항쟁 당시 계엄포고문을 읽고 있는 시민들의 모습. (사)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부마민주항쟁 당시 마산역 앞에서 시위대와 계엄군이 충돌하는 모습. (사)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문재인 대통령은 16일 오전 경남대 대운동장에서 열린 제40주년 부마민주항쟁기념식에 참석했다. 문 대통령은 “부마항쟁은 우리 역사상 가장 길고, 엄혹하고, 끝이 보이지 않았던 유신독재를 무너뜨렸다”며 “민주주의의 새벽을 연 위대한 항쟁”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민주주의는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실천하는 가운데 확장되는 것”이라며 “우리가 오늘 부마민주항쟁을 기념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위한 어제의 노력이 더 발전된 민주주의로 확장되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국가폭력 가해자들의 책임 소재도 철저히 규명하겠다. 이제 와서 문책하자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정의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것이다”라며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피해자들의 명예회복과 보상 등을 약속했다.

한편 부마항쟁은 4·19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과 함께 ‘한국 현대사의 4대 민주항쟁’으로 평가받는다.

부마민주항쟁 당시 언론사에 진주한 계엄군. (사)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부마민주항쟁 당시 통행금지 환원을 알리는 업소의 모습. (사)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시청 앞 계엄군의 탱크와 장갑차. (사)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출소하는 부마민주항쟁 시위대. (사)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부산시 경찰국 앞에 진주한 계엄군. (사)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동래경찰서 앞을 통과하는 부마민주항쟁 시위대. (사)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부마민주항쟁 당시 대기 중인 경찰기동대의 모습. (사)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법정 출두하는 시위 주도자 정광민. (사)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김지은 인턴기자